brunch

완벽한 자녀를 만나는 방법, 태아 프로그래밍

2025년 세계 건강의 날 기념 주제는 임산부와 태아의 건강입니다.

by 닥터하워드


매년 4월 7일은 세계보건기구(이하 WHO)가 지정한 세계 보건의 날입니다. 금년 행사의 주제인 “건강한 시작, 희망찬 미래(Healthy beginnings, hopeful futures)” 는 세상 모든 임산부와 태아의 건강을 지켜 밝은 미래를 일구자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세계건강의날.png


임신 중의 건강 관리는 태아의 건강한 발달에 필수라는 건 모두가 동의하실 거예요. 그런데 고혈압•당뇨처럼 주로 성인기 후에 나타나는 만성 질환도 태아기에 경험한 자궁 환경에 따라 미리 '프로그래밍' 된 결과일 수 있다는 건 아시나요? 이른바 ‘태아 프로그래밍(Fetal Programming)’ 이라 불리는 이 이론은 임신 중 모체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정립해 세계 각국에 큰 영향을 끼쳤답니다. 오늘은 필톡이 ‘태아 프로그래밍’의 역사와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게요!




태아 프로그래밍,
어떤 이론인가요?


Dr. David Barker(1938-2013) ©2001-2025 OHSU.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은 영국인 의학자 데이비드 바커가 1980년대에 처음 제안한 ‘바커 가설(Barker Hypothesis)’에서 시작됐어요. 이 가설을 간단히 요약하면 임신 중 모체의 영양 부족이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미쳐 성인기 이후 각종 대사 증후군과 만성질환의 발생률을 높일 수 있다는 내용이에요[1]. 몇년 전 한국교육방송에서 '퍼펙트 베이비' 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답니다.


'퍼펙트 베이비' 1부 중: EBS 다큐프라임 2013.06.24 ⓒ EBS

지금부터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의 학문적 근거가 된 대표 사례 및 연구 내용을 설명해 드릴게요!




네덜란드 대기근의 비극


20세기 초 전세계를 휩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가혹한 상황에 직면해 고통받곤 했죠. 그중 하나는 제 2차 세계대전 말,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대기근(Dutch famine 또는 hongerwinter)’ 사건이에요.


네덜란드대기근.jpg 1944년 암스테르담, 9세 소년 Henkie Holvast의 모습 ©National Institute for War Documentation 2025

1944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독일군은 서부 네덜란드로 가는 모든 식량 수송로를 봉쇄했어요. 이로 인해 약 450만 명의 주민들이 무려 6개월 동안 하루 필요량의 1/4수준인 400~800kcal 정도의 식량만 배급받으며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답니다. 그 결과 가장 보수적인 통계로도 최소 2만 명이 아사하는 비극이 벌어졌어요[2].

네덜란드대기근_식단.jpg 당시 성인 1인당 1일치 식량 배급 ©Nationaal Archief 2025

끔찍한 시기를 버텨낸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이 잘 아는 인물도 있어요. 바로 고전기 헐리우드의 간판 스타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이랍니다. 당시 십대 소녀였던 헵번은 전쟁이 터지자 네덜란드 귀족 출신인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피신했다가 재난에 휩쓸렸어요. 그 시기 수많은 네덜란드인이 그랬듯, 그녀 역시 극심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황달, 부종, 급성 빈혈, 천식까지 겹친 중병을 앓다가 연합군의 구호물자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어요[3].

[그림2]오드리헵번.jpg Audrey Hepburn in 1954. ©getty images 2025

종전 후 헵번은 헐리우드로 건너가 대성공을 거두지만, 유년기의 어두운 경험은 그녀의 일생 내내 영향을 미쳤어요. 오랜 영양실조로 생긴 허약 체질 탓에 발레리나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죽을 때까지 거식증, 불안장애, 빈혈, 관절 부종을 비롯한 여러 만성질환에 시달렸어요. 평생 동안 유지한 특유의 가녀린 몸매, 커다란 눈 밑에 드리운 짙은 다크 서클도 실은 혹독한 기아의 후유증이었죠.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생한 건 헵번만이 아니에요. 유럽 의학계는 1947년부터 태아 때 영양결핍을 겪고 태어난 네덜란드 전후 세대를 연구해 왔답니다. 그 결과 태아 시절에 기아를 겪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출생 체중이가벼웠고[4], 또 청년기에 비만, 정신장애, 성격장애가 발현할 비율이 이전 세대보다 높았으며[5] 스트레스에도 더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대기근’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던 거예요!



네덜란드 코호트 연구:
태아 프로그래밍의 태동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 의학센터(UMC)는 1994년부터 ‘네덜란드 대기근 출산 코호트 연구(The Dutch famine Birth Cohort)[6]’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연구진은 1944년~47년 사이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2,414명을 추적 조사해 임신 중 영양 결핍이 후세대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밝혔답니다.

네덜란드 대기근 출산 코호트 연구: 3단계 대상자 분류

연구 결과, 임신 초기부터 대기근을 겪은 그룹(이하 ‘초기노출군Early’)은 임신 중기나 후기에만 기근을 경험한 그룹(‘중기/후기노출군Mid/Late’)보다 대체로 건강 지수가 낮았어요. 초기노출군에 속한 사람은 비만, 2형 당뇨병, 관상동맥질환 같은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았고[7], 두뇌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은 경향을 보였어요. 또한 이들은 대조군보다 두뇌 노화 속도가 빨랐으며 치매•알츠하이머 같은 뇌신경질환에도 더 취약했어요[8]. 즉 태아 때의 영양 결핍이 부모 세대로부터 유전되지 않은 후천적 변화를 일으켰고, 이것이 자녀의 출생 이후 유지되다 성인기에 각종 질병으로 나타나도록 ‘프로그래밍’ 된 거라고 해석할 수 있어요.


할머니 세대의 임신 중 음주가 자녀의 성인기 간질환은 물론 손자녀의 간질환까지 유발할 수 있어요!

더욱 놀라운 건 대기근의 영향이 자녀 세대 이후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에요. 다른 연구에 따르면 태아 때 기근을 겪은 남성의 가계는 본인은 물론 자녀와 손자녀 세대까지도 비만과 과체중이 자주 발현됐고, 만성질환에도 취약한 경향을 보였어요[9,10]. 이외에도 임신 중 음주, 흡연, 약물복용, 스트레스 경험 등 다양한 요인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쳐 부모 세대와는 다른 취약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가 학계에 여럿 보고됐답니다[11].

태아스트레스가 미치는 영향.jpg 임신기 모체 스트레스가 태반을 거쳐 태아에게 유발할 수 있는 영향


임신 중 영양관리로
후손에게 건강을 선물하세요


이처럼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은 임신 중 모체가 제공한 환경이 평생 건강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큰 반향이 일었어요. 지금은 2000년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 이후 혜성처럼 현대 과학계에 등장한 ‘후성유전학(Epigenetic)’과 만나 학문의 질과 양 모두가 풍부해지고 있답니다. 혈압, 당뇨, 대사 증후군 같은 여러 성인병이 태아기에 경험한 환경에서 비롯되며, 그 이후의 미래 세대까지 유전될 수도 있기 때문에 임신 중의 세심한 건강 관리가 꼭 필요하다는 핵심 이념은 이미 세계 각국의 모자보건 정책에 널리 수용됐어요[12]. 현재 한국에서 시행 중인 임신 관련 정책에 여러 영양관리 사업이 포함된 것도 같은 맥락이랍니다.

임산부영양플러스제도.png 가까운 보건소에서 영양플러스제도를 이용하세요! ©문화체육관광부2023


건강한 몸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몸이 불편하면 행동 하나하나가 어렵고, 그러다 보면 마음까지 힘들어지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임신부의 영양 관리는 개인의 건강 차원을 넘어 자녀와 미래 세대의 삶의 질을 결정지을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어요.


이번 세계 건강의 날을 맞아, 필톡과 함께 소중한 미래를 준비하는 예비 어머니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면 어떨까요?



※임신 중 먹는 약이나 영양제가 있으신가요?

아래 링크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약물상호작용을 필톡에게 물어보세요!

서울대학교 병원의 전문의가 쉽고 빠르게 알려드립니다.







참고문헌

[1]Barker DJ. Fetal programming of coronary heart disease. Trends Endocrinol Metab. 2002;13(9):364-368. doi:10.1016/s1043-2760(02)00689-6

[2]Banning C. Food Shortage and Public Health, First Half of 1945. Ann Am Acad Polit Soc Sci. 1946; 245(1):93-110. doi:10.1177/000271624624500114

[3] Matzen R, Dotti L. Dutch Girl: Audrey Hepburn and World War II. Mirror Books; 2020.

[4] SMITH CA. Effects of maternal under nutrition upon the newborn infant in Holland (1944-1945). J Pediatr. 1947 Mar;30(3):229-43. doi: 10.1016/s0022-3476(47)80158-1. PMID: 20290346.

[5] Susser ES, Lin SP. Schizophrenia after prenatal exposure to the Dutch Hunger Winter of 1944-1945. Arch Gen Psychiatry. 1992 Dec;49(12):983-8. doi: 10.1001/archpsyc.1992.01820120071010. PMID: 1449385.

[6][8] De Rooij, S. R., Bleker, L. S., Painter, R. C., Ravelli, A. C., & Roseboom, T. J. (2021). Lessons learned from 25 Years of Research into Long term Consequences of Prenatal Exposure to the Dutch famine 1944–45: The Dutch famine Birth Cohort. International Journal of Environmental Health Research, 32(7), 1432–1446. https://doi.org/10.1080/09603123.2021.1888894

[7] Susser ES, Lin SP. Schizophrenia after prenatal exposure to the Dutch Hunger Winter of 1944-1945. Arch Gen Psychiatry. 1992 Dec;49(12):983-8. doi: 10.1001/archpsyc.1992.01820120071010. PMID: 1449385.

[9] Roseboom TJ, van der Meulen JH, Ravelli AC, Osmond C, Barker DJ, Bleker OP. Effects of prenatal exposure to the Dutch famine on adult disease in later life: an overview. Mol Cell Endocrinol. 2001 Dec 20;185(1-2):93-8. doi: 10.1016/s0303-7207(01)00721-3. PMID: 11738798.

[10] Franke K, Gaser C, Roseboom TJ, Schwab M, de Rooij SR. Premature brain aging in humans exposed to maternal nutrient restriction during early gestation. Neuroimage. 2018 Jun;173:460-471. doi: 10.1016/j.neuroimage.2017.10.047. Epub 2017 Oct 23. PMID: 29074280.

[11] Min-Hyoung Kim, Fetal Programming and Adult Disease. he Korean Society of Maternal and Child Health. 2017;21(1):1-13

[12]Ding M, Yuan C, Gaskins AJ, et al. Smoking during pregnancy in relation to grandchild birth weight and BMI trajectories. PLoS One. 2017;12(7):e0179368. Published 2017 Jul 12. doi:10.1371/journal.pone.0179368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