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충실성
언젠가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하는 기업의 홍보용 팜플렛 내용 작성하는 알바를 한 적이 있다. 해당 기업은 탄자니아의 어느 섬마을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단순한 태양열 발전기가 아니었다. 데이터와 ai 기술을 활용해서 발전량이 많을 때는 잉여 전기를 따로 보관하고 모자랄 때는 미리 모아뒀던 잉여 전기와 디젤 발전기로 보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전기를 공급'하는 게 아니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전자와 후자는 운니지차다. 안정적인 전기 공급은 냉장고의 사용을 가능하게 한다. 냉장고가 다양한 영양소 섭취와 식인성 질병 예방을 통해 평균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려주는 기적의 도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 전세계 인구 중 전기를 공급받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20% / 50% / 80%
최근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 <팩트풀니스>가 던진 질문을 보고 위의 내용이 새삼 떠올랐다. 마다가스카르 건너편에 있다는 것과 스와힐리어를 쓴다는 것밖에 모르는 어느 나라 섬마을에도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될 정도라면, 그래도 세계 인구의 절반 가량은 전기를 공급받고 있지 않을까?
물론 틀렸다. 정답은 80%다. 이미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기는 사치제가 아니라 생필품이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20%로 답한다고 한다. 나는 정답은 아닐지언정 그나마 나은 답을 택했다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상기한 알바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고 그게 아니었다면 20%를 택했을테니 잘난척 할만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한다. 해당 문제는 객관식이기에 눈을 감고 찍더라도, 설령 침팬지가 풀더라도 정답률이 30프로 가량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의 정답률은 10프로도 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며, 절반 이상은 오답 중에서도 정답과 가장 거리가 먼 답을 택한다. 교육 수준과 직종의 전문성을 불문한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생에서 마주치는 현상과 사건에 대한 분석을 직관과 감에 의존하며 대부분의 결과는 매우 부당하다. 책은 각 장 별로 그 이유와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내가 비문학 중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는 <생각에 관한 생각>과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졌으되, 더욱 실용적이고 실천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우열이 있는 건 아니다. 둘 다 직접 읽어보고 확인할 가치가 충분하므로 상세한 설명은 통과하자.
다만 한 가지, 우리가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마지막 이유로 꼽은 것만은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다급함, 그러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두려움이다. 저자는 누군가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고 한다. 그런 표현은 으레 상대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수작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급함 본능'이라고 명명된 것은 개인의 소비생활부터 온난화나 팬데믹 등 전세계에 영향을 주는 거대 이슈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악영향을 준다. 나는 특히, 이 시대 이 땅의 무수한 청춘들을 병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그 다급함 본능이라 느낀다. 20대 혹은 30대에 반드시 해야하거나 이뤄야 할 것들. 그 때가 아니면 평생 할 수 없는 것들. 그래도 그 범주 안에 든 사람 중에서는 꽤 고령에 이르렀기에 말 할 수 있는데, 정말 다 개소리다. 때라는 것은 없다. 관악산에 벚꽃이 피었고 아마 곧 질테지만, 내년이면 또 필 것이다. 다들 그걸 진심으로 믿을 수 있다면, 조금씩은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
물론 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나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