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말입니다
어머니는 경기도 외곽 도시 비석처럼 넓고 얇고 긴 임대 아파트에 산다. 경기도 외곽 도시의 하늘은 서울보다 훨씬 넓지만 어째 늘 흐릿하고 낮아서, 조잡한 천장화처럼 갑갑하다.
어머니는 늘 몸이 안 좋고 가려면 빨리 가버려야 날 고생시키지 않는다고 연륜에 비해 너무 이른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외출 횟수는 확 줄었다. 옆동에선 코로나로 단지 앞을 흐르는 하천은 장마철 범람으로 반대편 대로에는 무단횡단으로 눈길발길 닿는 곳마다 늘 ‘빨리 가버린’ 사람이 있어서, 당신은 늘 임대 아파트의 열평 남짓한 공간에서 숨 죽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몇 해 전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괜찮다고 괜찮다고 반복하다 급기야 화를 벌컥내며 욕을 퍼붓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어컨을 들여놓았다. 사실상 무직 백수인 입장에서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어느새 노년의 문턱에 있는 어머니가 부실한 선풍기 한 대만으로 여름을 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화를 푼 어머니에게 난 짐짓 생색을 냈다. 엄마, 나 이거 글써서 번 돈으로 산거야. 맨날 쓰잘데기 없는 짓한다고 구박했던 그 글 써서. 기억하시라구요. 어머니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 말미에 조그맣게 고맙다고 덧붙였다.
실은 어머니는 내가 글 쓰는 걸 딱히 구박하지 않았다.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읽고 늘 허무맹랑한 글이나 끼적인다고 구박하는 건 늘 아버지 쪽이었다. 하루는 글 쓰는 나에게 장도리를 휘둘렀다. 의지와 꿈으로 충만한 나는 전혀 아프지 않을 줄 알았다. 어깻죽지에 첫타를 맞자마자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알았다. 아파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후속타를 막기 위해 드잡이질에 들어갔다. 어찌어찌 장도리를 뺏어들었다. 차마 내리칠 수 없었던 나는 그 길로 집을 나갔다. 챙긴거라곤 손에 들고 있던 장도리 뿐이었다. 두고가면 그걸 또 집어들고 쫓아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스무살이었다. 그 뒤 이 년 남짓 밖을 떠돌았다.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라는 건 허상이었다. 불만과 원망뿐이었던 집안의 그늘에서 벗어나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몸 뉘일 곳도 스스로 마련해야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글은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머니와는 종종 통화했다. 어느 날인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언쟁을 벌였다. 나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대체 나한테 해준게 뭐 있냐고 소리질렀다. 어머니는 잠깐 침묵하다가 무심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달 후, 어머니는 마치 쭉 연락해 왔던 것처럼 태연하게 연락해왔다. 나도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당신과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날 백화점에 데려가 정장을 맞춰줬다. 몸에 걸쳐본 것 중 가장 비싼 옷이었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고가의 정장에 싱글벙글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늘 그랬듯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이제 해준 거 하나 있다. 그치?
무심한데다가 기억력조차 형편 없는 어머니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일일 게다. 아니,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누군가 마음의 안쪽을 할퀴는 느낌이다. 그 상처에 고통받는 것은 어머니가 아닌 나뿐이길 바란다.
직장이라는 변명거리도 없는 처지라 요새는 되도록 자주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는 여전히 짐짓 무심하게 왜 자꾸 오냐며, 김치며 장아찌며 하는 것들을 한아름 들려주곤 한다.
하지만 오는 길이 얼마나 더웠는지 모른다고 아이처럼 엄살을 부리면, 어머니는 전기세 아낀다고 꺼두었던 에어컨을 얼른 ‘최강’으로 켜둔다. 그리고 에어컨을 들여놓은 뒤 늘 대화의 말미마다 똑같이 덧붙였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이다. 에어컨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