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접시로 막을 것을 백접시로 막게된 사연
어머니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남산에 어린이회관이라는 것이 생겼다. 당시 사회란게 북한이랑 비슷했던지 인근 학교에서 학생들을 차출해 개막식에 동원했다. 어머니는 거기 포함됐다. 대체 왜? 의아해하는 내게 어머니는 지금은 늙어서 이렇지 그 땐 나쁘지 않았다 발끈했다. 내가 보기엔 외할머니의 영향이었다. 언젠가 딱 한 번 봤던 낡은 사진 속의 그 분은 깜짝 놀랄만큼 아름다웠다. 근데 엄만 왜 이래? 라는 질문에 분노와 머쓱함이 뒤섞인 표정의 어머니가 머리를 후렸다. 게다가 선생 면담 같은게 있으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짐작하기에 품속에 지닌 흰봉투도 손색이 없었으니 담임 입장에선 좀 사는 집 애라고 착각할만했다.
하여간 행사에 참여한 어머니는 당대의 영부인의 모습을 비롯해 행사의 디테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마음 속에 선명하게 남아 그 후 반백년이 지나 그 땐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조차 기억하고 있는 것은 행사와 행사 사이의 점심시간 뿐이다. 대부분 착각이 아니었던, 그러니까 좀 사는 집 애들이었던 동원인력들은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먹었다. 노오란, 아마도 계란으로 짐작되는 무언가를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어머니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맛이 간절했다. 도시락을 싸온 것은 어머니 뿐이었다. 옛날식 양은 도시락에는 밥과 김치 뿐이었다. 밥에는 김치 국물이 잔뜩 스며 있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너무나 부끄러워서 반의 반도 채 못 먹고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예의 노오란 음식이 '오므라이스'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후에 태어난 어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나를 키워낸 건 팔할이 오므라이스였다. 난 그 옛날 어린이회관에서 만들어지고 먹혔을 오므라이스의 족히 수십배는 먹어치웠다. 체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몸부림처럼, 딱히 오므라이스 중독도 아니었던 나는 먹고 또 먹었다. 아침으로 먹고 점심으로 먹고 저녁으로 먹고 때론 간식이나 야참으로도 먹었다. 오므라이스가 물리면 또 오므라이스를 먹어서 오직 오므라이스 안에서만 극복했다. 케찹도 뿌려보고 마요네즈도 뿌려보고 돈까스 소스도 뿌려봤다. 계란 지단을 먼저 먹고 밥을 먹어보기도 했고 밥을 먼저 먹고 지단을 후식으로 먹어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어린이회관에 갔던 바로 그 나이가 될 무렵 나는 이제 오므라이스가 싫다고 눈물까지 보였다. 그러고서야 끝이 보이지 않아 더욱 절망적이었던 오므라이스 지옥을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결코 내 돈 주고는 먹지 않았던 오므라이스를 입에 넣어본지 족히 십수년은 지난 듯 하다. 그래도 누가 사준다고 하면 굳이 거절할 것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어린이 회관에서 김치국물 새버린 도시락을 슬쩍 덮어버리는 어린 여자애가 가엾어서는 아니다. 앞으로 내 남은 생애 동안 적어도 오므라이스 관련해서는 결코 한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