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바롬 Sep 20. 2024

그림자 도둑

습작 꽁트 2

 온 마을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길게 기른 흰 수염을 쓰다듬는 거 외에 하는 일이 없는 줄 알았던 촌장은 웬일로 기민하게 관아로 달려가 부디 그림자를 되찾아 주시어 백성들의 지원극통함을 풀어 주십사 상소했지만, 고을 사또는 고개만 갸웃하고 그깟 그림자 좀 없어진 게 뭔 대수란 말이냐 할 뿐이니, 구변 좋은 촌장이라지만 그야 무식한 촌무지렁이들 사이에서나 좋은 구변이지, 아무래도 할 말이 없어 입맛만 쩍 다시다가 뒷꼭지를 긁적이며 돌아왔다.


 그림자를 잃은 자들은 밥도 잠도 잊고 초가지붕 위든 당산나무 위든 산꼭대기든, 밝고 높은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솟대 위 까막새처럼 자리 잡고 앉아 하염없이 볕내를 쬐다가 혹시나 해서 엉덩이 밑을 살폈다가, 이윽고 해가 지면 눈물 한 방울 떨구고 힘없이 내려오곤 했다. 더러 목매달아 죽은 자도 있었는데, 게 중에는 가장 처음 그림자를 잃은 사달댁이 울며불며 난리를 칠 때, 그깟 그림자 없어진 것도 유세냐고 했다가 머리채를 잡고 싸웠던 갖바치 마누라 장씨도 있었다.


 도성에서 내려온 감사라는 화상들은, 그림자를 되찾아 주기는커녕 제 그림자 간수도 못해 어딘지도 모르게 떨궈 놓고 꽁무니가 가렵다고 도망가 버리는지라. 그 중 마지막으로 온 감사는, 그나마 그림자를 되찾을 생각도 않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림자가 사라졌다고 큰 일이 난 것도 아닌데 각자 제 할 일로 돌아가거라 꾸짖었는데, 그림자를 잃고 전에 없이 겁이 없어진 사람들이 그게 별 거 아닌 것 같으면 제 놈 그림자도 내놓으라지, 모양만 수군거림이지 기실 다 들으라고 외치는 소리에 무엄하다 길길이 날뛰더니, 정작 제 그림자가 사라지자 하루 종일 볕바른 곳에 주저앉아 그림자를 잃다니, 그림자를 잃다니, 중얼거리며 울기만 하다가 이내 온다간다 말도 없이 도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와 연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림자를 되찾아 오기로 결심했다. 아직까지 마을에서 유일하게 그림자를 간수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림자를 되찾아오는 자에게 나라님이 큰 상을 내려주실 거라 말해준 것은 촌장이었다. 그것은 기실 올해 소출 걱정에 입맛까지 잃어 하루 세 끼 밖에 자시질 못하는 사또의 옥체 건승을 염려한 구실아치가 촌장과 함께 꾸며낸 거짓기약이었으나, 미련한 소와 연은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이제껏 가진 것 없이 무식하기만 한 놈들이라고 얼마나 무시당해왔나. 나라님께 상을 받으면 아무도 자신들을 얕잡아보지 못할 터였다. 사실 무시했다고 해봤자 남들 다 서로서로에게 하는 것이지만, 연은 얼마 전 푸줏간 전가가 똑같이 고기 한 근 달라고 하는데 자신은 정말로 한 근만 주고 옆에 있던 아낙에겐 한 근 하고도 십분지 일이 더 되어 보이는 고기를 얹어 준 일까지 죄다 기억해내며 앙갚음 해줄 기쁨에 발걸음이 덩실덩실 가볍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림자의 행방에 대해 무성한 추측만 내놓았는데, 가장 그럴 듯한 것은 그림자들이 마을 어귀 도래샘 건너 숲 속, 마가리 동굴로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수도에서 내려온, 결국 그림자를 잃고 줄행랑을 친 감사들은 사람들이 동굴 이야기를 일러 주어도 픽 웃으며 무지몽매한 놈들, 하는 눈빛으로 가볼 생각도 안했지만, 오냐 두고 보아라. 우리가 등에 그림자를 한 아름 지고 돌아와 임자를 찾아줄 때에도 네 놈들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을 터이니.


 마가리 동굴로 향하는 길, 소와 연은 즐거운 마음으로, 각자 나라님이 내려주신다는 상이 무얼까 예상해보았다. 소는 궁중 창고에 있다는 마르지 않는 술독을 말하고, 이에 질세라 연은 하루에 비단 한 필을 짓는다는 거미를 말하고, 서로 자기가 더 대단한 것을 말한 것인 양 뻐기다가, 연이 말하길, 그래도 마름 둘 만한 땅뙈기랑 고래등 겉은 집이 최고지. 다른 것들은 아모짝에도 간데없는 것이여,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연은 마음속으로 혹시 감사 자리는 이 연이가 차지하는 거 아닐까하고 소가 가로챌까봐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생각을 해보는데, 상상만으로도 벌써 군침이 돌았다. 감사만 오면 그 높은 콧대를 꺾고 꼬리를 친다는 기생 윤이년, 고 년에게 다른 건 안 바라니 따라주는 술 한 모금에 입에 넣어주는 안주에, 교태를 부리며 감사님, 하고 간드러지게 불러주는 소리만 듣는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연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소도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 미련하기가 곰 같은 치도 술 마셨을 때 말고 얼굴 붉어질 때가 있었으니, 젖통네 주막 주모의 딸, 정이가 고운 눈으로 자기를 흘겨볼 때였다. 몇 달 전엔 술에 잔뜩 취하여 젖통네에게 이야기를 꺼냈다가, 너처럼 땅 한 뙈기 없는 놈이 보는 눈은 있어서 누굴 넘보느냐, 무안만 당하고 집에 돌아가서 엄니, 나 정이한테 장가보내줘! 무작정 떼를 쓰다 밥 짓던 주걱으로 뺨에 불이 나도록 얻어맞은 참이었다. 젖통네도 요새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풀이 죽어 장사도 안 한다던디, 젖통네랑 정이 그림자를 가져가서 장모님, 하고 넙죽 엎드리면 설마 그 때도 사윗감으로 한참 모자란 놈이라 면박을 주진 않겄지, 하니 벌써부터 입이 헤벌어졌다. 정이한테 장가들 수만 있다면 나라님의 상은 연이 놈이 다 가져도 좋았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었지만, 정이라면 엄니랑 바꿔도 좋았다.


 이윽고 소와 연은 마가리 동굴에 도착했다. 범이 아가리를 쩍 벌려 씨커먼 목구멍을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에도 그들은 각자의 희망에 한껏 고조되어 코털도 가렵지 않았다. 소는 정이랑 같이 살 신방 꾸밀 생각에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좋아서 지가 동굴 앞에 서 있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있는데, 문득 연이 기절초풍하여 오매! 하고 기성을 지르더니 뭔 일이당가? 소의 질문은 들리지도 않는지 맥이 탁 풀려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오 방성대곡을 하는지라. 소는 뭔 일인가 싶어 코 베어갔나 얼굴도 만져보고, 신발짝 잃었나 신발도 찾아보고, 배꼽이 도망갔나 배꼽도 찔러봤는데 몹시 아프니깐 화가 나서 버럭 성을 내다가 발치를 보니 아뿔싸, 그림자가 없는지라.


 어이쿠! 하며 소도 망연히 섰다. 언젠가 엄니가 아가,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왜 이리 눈앞이 캄캄해지는지 모르것다, 하길래 아따 엄니, 훤한 대낮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수도 있다요, 하고 퉁박을 준적이 있었는데 엄니, 눈앞에 캄캄해진다는 게 이런 거였소. 불쌍한 엄니를 하염없이 부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잃기 전엔 몰랐는데 잃고 나니 하늘이 통짜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목이 잠기도록 한참을 통곡하고 나니 소는 기운도 빠지고 배도 고프고 해서, 엄니가 싸다준 주먹밥을 꺼내서 요기나 하려는데, 어느새 옆에 나무 위에 기어 올라가 햇빛 한 번 제 엉덩이 한 번 번갈아 보고만 있는 연에게 자네는 한 입 안하려는가? 물으니 이제 와서 뭔 소용이냐며 버럭 소리만 치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뭇가지 위에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서서 해를 향해 손을 싹싹 빌며 치성을 올렸다. 앞으로 윤이 같은 년은 흘끗으로도 안보겠다는 말이 당최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눈물 반 투정 반 연의 기도 소리를 들어가며, 소는 주먹밥 한 입 눈물 한 모금 삼키면서 끅끅거렸다. 결국 목이 메어 반쯤 남은 주먹밥은 손 안에서 뭉그러지게 놔두고 엄닌지 정인지 부르며 또 한바탕 통곡을 하려는데, 오매?


 소가 본 것은 마가리 동굴 안에서 나오는 청설모였다. 청설모가 굴 안에 사는 법도 있었당가. 소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청설모는 몇 걸음 걷다 두발로 일어서 제 발치를 확인하고, 또 몇 걸음 걷다 일어서 확인하고, 또 걷다 또 확인하고, 적이 안심했다는 듯이 근처 나무까지 달려가 기어 올라갔다. 소는 그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그림자를 똑똑히 보았다.


 정신이 번쩍 든 소는 후다닥 일어나 동굴 안에 들어갔다. 아차, 소가 다시 동굴에서 나와 연에게 손짓하며 어이, 하고 부르는데 아 나는 됐응께 혼자 쳐자시라고! 또 버럭 소리를 치는 서슬에 아따 그 놈 승질머리하고는, 할 수 없이 혼자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해온 횃대에 불을 붙여 들고 한참을 들어가도 별 신통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슬슬 아까 그 청설모가 헛것이 아니었는지, 아니 애초에 짐승들은 그림자를 잃지 않았던 것 아닌지, 그러고 보니 으렁이 영감네 황구가 그림자가 있었던가, 고민하고 있을 즈음에 소는 동굴호수에 도착했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마을사람들에게 그 호수가 동굴의 끝이라는 이야기는 들은바가 있었다. 기운이 쭉 빠진 연이 혹시 천장에 뭐가 붙어있진 않을까 해서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푸드득! 오매 엄니! 빛에 놀란 박쥐 날개소리에 횃불을 놓쳐버렸다. 치이익! 하필 동굴호수에 떨어진 횃불이 꺼져버렸다. 소는 당황해서 발치를 더듬으며 한참을 허둥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홉떴다. 요, 요것이 무어여?


 그것은 그림자였다. 똑같이 어두운 그늘일진데, 그 어두컴컴한 소의 발밑에 더 캄캄한 그림자가 붙어있었다. 너무 기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소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양새와 똑같이 그림자도 덩실덩실 춤을 췄다. 소는 주저앉아 기실 동굴 바닥인 그림자를 쓰다듬으며 어이구 이놈아, 왜 도망한 것이여, 하고 타박했지만 횃불 빛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의 그림자는 도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동굴 밖을 나서서 햇빛을 쬐어도 다행히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자를 똑똑히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아직도 미련하게 밝고 높은 곳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 연이 보였다. 그러나 소는 그에게 그림자의 행방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대로 연을 내버려 두고 마을로 향하며 소는 생각했다. 스스로 찾지 못한다면 금세 다시 잃어버리리라. 소는 자신이 제법 똑똑한 생각을 했다고 뿌듯해 하며, 발밑에 그림자가 잘 따라오고 있나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작가의 이전글 낙타 落墮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