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치는 너무 맛있으면 안돼요

중식당 김치, 1초의 일몰, 그리고 파인다이닝

by 김바롬

먹고 살려고 시드니의 중식당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새로운 재료 조달 업체에서 김치 한 박스를 보내왔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지금 쓰는 걸 제끼고 자기네 걸 써달라는 것이었다.


스텝밀로 나온, 오징어와 홍합을 최소화한 양파 짬뽕과 함께 예의 김치를 시식했다. 아삭아삭 시원한 것이 샘플이니만큼 특별히 신경써서 골랐을 걸 감안해도 기존에 쓰던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못 쓰겠다는 것이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나름 요식업계 종사자인데 혀가 저래서 어쩌자는 거지?


나이는 나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주방 경력은 한참 위였던 면장에게 몇 마디 듣고 나서야 그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짱개집에서 단무지나 김치는 별로 안 중요해요. 기본만 하면 되는 거에요.


면장이 먼저 들어가고 나서 두 대에 담배를 연달아 더 피우고 나니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구색 맞추기용 김치가 지나치게 맛있으면 리필이 잦아져 홀의 동선이 꼬이고, 원가가 상승하며, 테이블 회전율만 낮아질 뿐이었다. 게다가 김치가 맛있다는 걸 한정식이나 국밥 집도 아니고 중식당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매출에 의미가 있을만큼 흔할 리 없다. 고로 지나치게 맛있는 김치는 역설적으로 손해만 가져오는 것이다.


마침 그 시기에 호주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업계인에게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해당 영화에 일몰 장면을 찍기 위해 전 스텝이 이틀 밤낮을 꼬박 고생했다고 들었다. 확인해본 바로 해당 장면은 1초도 나오지 않았고, 꽤나 화제가 됐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든 관객이든 해당 장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 감독도 그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죽고 나서도 한참 뒤에 어느 영화학도가 발견하여 흥분할 만한 의미가 담겨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게 뭔 상관이야 하고 정색하면서 물으면 할 말이 곤궁해지겠지만 어째 난 그 일몰 장면이 중식당의 너무 맛있는 김치와도 연관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날 깨닫게 해준 어린 면장의 꿈은 자기 가게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는 자긴 장사를 하고 싶은게 아니라 요리를 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짐작할 만 했다. 회전율이나 원가율, 순이익과 맛의 대중성과는 상관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일테다.


역시나 정확히 무슨 연관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김치를 먹다보면 너무 맛있으면 안 되는 중식당의 김치, 전스텝을 이틀 동안 고생시켜 찍어낸 1초도 되지 않는 일몰 장면, 그리고 장사가 아닌 요리를 하고 싶었던 어린 면장이 줄줄이 떠오르곤 한다. 김치 한 조각에 상념에 빠질 나이가 되었다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까리쓰마가 이쓰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