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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Dec 08. 2020

언제쯤 다 클까

아홉번째 불가사의

 멜번 한식당에서 일할 때였다. 첫출근 이후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주방 실장의 환심을 사는 것이 향후 수개월의 업무 난이도를 좌우할 것임을 파악했다.


 넌 제일 자신있는 게 뭐니? 나이 알아맞추는 거요. 내가 몇 살로 보이는데? 죄송하지만 연배보다 한두 살 더 들어보이시는 것 같아요. 80년대 초반 생이시죠? 나랑 띠동갑인 조리장은 내 팔을 찰싹 때리며 아홍호홍홍홍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봫홍홍롷홍호 했다.


 한국 계실 땐 정릉 사셨다고요? 세상에, 영화 건축학개론의 수지가 정릉 살잖아요. 실장님 완전 멜번의 수지시네!


 와우, 이 김치전 바삭한거 봐. 크리스피, 크리스피! 예? 입으로 낸 소리 아니에요. 들어보세요. 크리스피, 크리스피! 실장님의 김치전은 멜번의 삼대 관광 코스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요.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필립 아일랜드, 그리고 김치전!


 ...그렇게 다채로운 혀놀림으로 신뢰를 쌓은 덕에 난 외노자 치곤 상당히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비열하다고? 삶의 지혜다.



 하루는 주방 분위기가 수렁에 빠진 양상이었다. 늘 밝고 명랑했던 실장이 바퀴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실장은 그렇다고 엉뚱한 직원들에게 화를 내거나 하는 상사는 아니었지만, 바로 그런 그녀가 전례없이 삭막한 분위기를 연출하니 다른 직원들은 호흡이 힘들어질 지경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하도 옆구리를 찔러대는 통에 결국 평소에 아부... 아니, 다채로운 혀놀림으로 신뢰를 쌓아뒀던 내가 나서야했다. 저, 실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내심 기다려왔는지 실장은 폭포수처럼 넋두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문장 파편들을 재배열하느라 애먹었지만, 하여간 간신히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날 아침, 실장과 그 열네살짜리 아들은 각자 출근과 등교를 위해 남편이자 아빠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 때 라디오에서 아주 웃긴 얘기가 나왔다. 호주에도 싱글벙글 쇼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남편과 아들은 뒤집어져라 웃었지만, 입모양이 보이지 않는 라디오라 실장은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배를 잡고 웃는 아들을 겨우 진정시켜 방금 뭐라고 한거냐고 물어봤는데, 세상에, 아들이 바퀴벌레 씹은 표정으로 면박을 주더라는 것이다. 엄뫄. 엄뫄는 왜 이런거뚜 모다라드뤄?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멜번은 우울증 환자가 많기로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대부분 우중충한 날씨 탓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민 2세대가 많은 탓이다. 얼굴과 피부색은 고향 나라의 것이지만 언어도 문화도 가치관도 호주식이고,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진짜 호주인으로 인정해주지는 않고, 근데 또 부모의 언어도 문화도 가치관도 고향 나라의 것이다. 선생님과 엄마의 학부모 상담조차 통역해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다보면 대체 왜 우리 엄만 영어를 못하는 건지 짜증이 날 만도 하다. 무엇보다, 고작 열네살짜리 아닌가.


 물론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뭐라고요? 그 자식 안 되겠네! 지가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는데? 지는 학기당 만불짜리 학교 다니면서 편하게 영어 배우는 동안 엄마는 지 먹여살리겠다고 하루종일 주방에만 있느라 그런 거지. 아저씨는 그 말을 듣고만 계셨어요? 아주 혼구녕을 내줘야지. 안 되겠다, 저라도 말해줘야겠어요. 한 번 데려오세요. 그 자식 전에 용돈도 줬는데 아주 못 쓰겠네!


 이쯤 되면 오히려 실장이 나를 말리기 마련이다. 아휴, 그럴 거 없어. 아직 열네살짜리잖니.


 해서 실장의 마음은 어찌어찌 사르르 풀려버리고, 수렁에 빠졌던 주방 분위기는 다시금 평화를 되찾고, 뒤켠에서 보고 있던 다른 직원들은 소리 없이 환호하며 내게 엄지를 치켜올리는 것이다.



 ...얼마 전 어머니에게 스마트폰으로 지하철 급행 시간표 보는 법을 알려주다 버럭 화를 내고 나서 떠오른 잊고 있던 옛 이야기다. 지금쯤 작은 이모가 그 쌍놈의 새끼 안 되겠다고 짐짓 노발대발 하고 있을 테고, 어머니는 도리어 작은 이모를 말리고 있겠지. 아휴, 그럴 거 없어. 아직 서른네살짜리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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