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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Aug 20. 2022

워딩 지랄

워딩이라는 워딩 쓰지 마세요

 '워딩'이라는 단어는 근 20여년 만에 '웰빙'을 제치고 내게 가장 혐오스러운 유행어 자리를 갱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의 혐오감은 단어 자체보다 주로 그것을 남용하는 작자들의 근원적이고 심대한 착각에서 비롯한다. 즉 언어를 인식의 반영이 아닌 인식 개조를 위한 수단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이 유행어를 체감상 가장 자주 활용하는 이들은 스스로 성평등 실현을 대의로 삼고있다 주장하는 일군의 싸이버 전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대로 사회에서 성차별을 암시하는 모든 표현을 일소한다 해도(물론 그들은 전 국민이 수화로 대화하고 그러고도 손가락을 곧추 세우거나 둥글게 말아 동그라미를 표시하는 모든 손동작을 금지시킬 것이며 그 후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테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성평등이 실현되고 있다는 사회적 착시에 불과하다. 마치 고열을 감기의 증상이 아닌 원인으로 착각하여 오직 해열제로 치료하려는 돌팔이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그 착시는 그들의 대의를 위한 발판은 커녕 극복해야할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심지어 비언어적이며 비접촉적인 성희롱을(법률적 제재 가능성은 회의적이지만, 그런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한다) 시선 강간이라고 표현하거나, 생각 부족한 소년들이(세상엔 환갑 넘은 소년들도 부지기수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주고받는 음담패설을 강간 문화라고 표현하는 언어의 오용, 학대를 일으키는 행태는 분노마저 자아낸다. 그들의 방식대로 하자면 그건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강간 아닌가? 그들은 부러 자극적 어휘를 만들어 사회적 인식을 환기하려는 목적이라 주장하겠지만, 나날이 흉악스러워지는 담배곽의 경고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 사람은 자극에 무뎌지기 마련이며 결국 성희롱이나 음담패설을 강간만큼이나 심각한 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강간을 성희롱이나 음담패설 정도의 일로 인식하게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고 조지 오웰 풍 젠더 디스토피아 구축을 위해 여념이 없겠지만 말이다.


 비슷한 행보를 한두걸음 앞서 보이고 있는 것이 탈코르셋 운동이다. 본래 여성에 대한 관습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던 그것은 오래지 않아 급격한 교조화를 거친 끝에(바로 그게 모든 사회 운동가들이 사회 운동가이기 이전에 학자여야 하는 이유이다) 탈코르셋이라는 새로운, 혹은 전과 다를바 없는 억압을 만들어냈다. 걸스 캔 두 애니띵 뒤에는 괄호 열고 화장과 긴머리와 치마와 다이어트와 장신구를 비롯한 무수한 예외 조항이 덧붙어 있으며 그 목록은 이 순간에도 갱신 중이다. 결국 괄호가 닫히는 날, 이 나라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 의해 여성이 히잡을 뒤집어 쓰게 된 곳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엔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나라에 포스트 트럼프, 어쩌면 포스트 두테르테가 탄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예의 무리들은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성평등 실현이 아닌 성별간 갈등 구조의 영구적 고착이 아닌가 하는, 즉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원하는게 아니라 그저 마음껏 떠들고 욕하고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악성 훌리건들과 다를바 없는 부류가 아닌가 하는 나의 불유쾌한 의심이 만에하나 사실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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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모 대학가의 구성원이 인권을 가진 존재라면 겪어서는 안되는 일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함께해야할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채 겪어낸 끝에 생명을 잃는 일이 있었다. 일군의 무리들은 그것조차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적 자원화를 시도했고 상대편은 그것을 지적하며 악다구니를 쓰는 와중에 고인에 대한 동정도 예의도 슬픔도 심지어 유족이 원하는 무관심조차 실종되어 찾을 길이 없다. 정확히 3년 4개월 전 썼던 글을 찾아 기록해둔다. 지금 썼다고 뻥을 쳐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듯 하여 마음이 복잡하다. 특히 포스트 두테르테 운운은 밑도 끝도 없이 여성부 폐지 어쩌고하는 해경을 해체하겠습니다와 같은 수준의 허튼 소리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더욱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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