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가, 이 집에서
빛나라 그럼 너는 1광년 밖에서도 눈부실 것이다(1)
빛나라 그럼 너는 1광년 밖에서도 눈 부실 것이다.
-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진실한 이야기, 거짓된 이야기
“그럼 나가, 이 집에서”
금요일 오후 10시, 이 말과 함께 집을 뛰쳐나갔다. 나간다고 해도 별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대고 있던 버팀목이 버팀을 포기하는 순간 쓰러져버리듯 현관문을 젖혔다. 문을 열고 보니 어디론가 떠날 수단도, 돈도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휴대 전화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스쳐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잡아챈 아버지의 차 열쇠뿐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길이 보이는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떠남이라면 악셀레이터에 발을 떼지 못한 채 점점 올라가는 속도와 기대가 무너진 순간의 주마등처럼 주변 풍경이 초점 잡을 새 없이 흘러가는 게 아니던가. 망할 교통체계는 어떻게 된 건지 집을 떠난 지 5분 만에 벌써 세 번째 빨간불에 잡혀 멈춰서 있다. 오른발은 브레이크 위에서 부들거리고 있었고 차창 밖의 풍경은 선명했다. 눈에 익은 가게들을 보고 있으니 갑작스레 울컥하고 속에 잠겨 있던 무언가가 터진 듯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작은 균열들은 점점 가면서 온 얼굴의 주름을 지어가며 바깥의 누구보다 서러워했다. 한적한 도로의 갓길에 차를 세웠을 때야 세 가지를 알 수 있었다. 30분을 내리 울며 도착한 곳은 일주일에 한 번씩 들리던 드라이브 코스라는 것, 그 30분 사이에 망할 교통체계 덕분에 빨간불에 20번은 넘게 걸렸다는 것, 그리고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 얼마나 울어댔는지 차창이 쉽게 뿌옇게 올라왔다. 조용히 한적한 도로에서 누워 쉬고 싶었지만, 한기가 올라와 시동을 끌 수 없었다. 그렇게 자동차의 엔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시 눈을 붙여보기로 했다.
눈을 떠보니 부재중이 와있었다. 친구들의 전화였다. 아버지와 한바탕하기 전에 친구 놈들에게 하소연했던 탓에 부재중이 분 단위로 쌓여있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응.”
“어떻게 됐는데? 전화를 왜 안 받노?”
“흐흐흐흐, 뭐 그래 됐다.”
“그게 뭐고, 그래서 얼마면 되는데? 수중에 200만원 정도 있는데 이 정도라도 도움이 되겠나? 일단 됐고 계좌 불러봐라.”
“꺼져라, 미친놈아. 뭔 대학생이 돈이 있다고 빌려준다고 하노? 그냥 자라. 고맙다. 이건 꼭 갚을게 개놈아”
“아니 됐고 계좌 불러보라고.”
“아니다. 진짜 고맙다. 이건 내가 살면서 복수라고 생각하고 갚을 거다. 진짜 필요하면 다시 전화할게.”
“후... 헛짓거리 하지 말고 자기 전에 연락해라.”
전화를 끊자 바로 다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돈이 있는지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
“그래서 얼마면 돼? 초기 자금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지원해줄게. 계좌 불러줘.”
평소에 뭐 그리 발전적인 사이였다고 이렇게 두 팔 걷어 응원해대는지 너무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쓸데없는 걱정해주는 놈들에게 화가 났다. 그냥 나라는 사람을 믿고 저렇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오늘은 기뻐할 수 없는 날이어서 화가 나서 우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고서 실행했었다. 운이 좋게도 하는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났다고 했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나의 삶에, 이십여년간 삶의 버팀목이었던 사람에게 조심스레, 하지만 당당하게 고해성사했다. 전공과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교육해보고 싶고,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그리 큰 규모도 아니었고, 대단한 시작도 아니었다. 혹시 누군가가 TV에 나오는 그들처럼 공들였냐고 혹은 최선을 다했냐고 물어본다면 끄덕이기도 애매할 만큼의 정도일지도 모르는 정성을 쏟았다. 그래도 두 번은 하지 못하지 않을까 싶은정도의 공을 들였고, 살면서 처음으로 최선을 다했던 일을 부정당했다는 것이 슬펐다. 그것도 나의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께. 아버지에게 교육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고 선언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중력이었다. 그저 심적인 추락으로 나타나는 그런 무중력이 아니었다. 몇 년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활동해왔던 것들과 그에 대한 결과물로 받아온 상장, 상패 등이 공중으로 떠다녔다.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허락하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고 모든 걸 부정당했다.
“그렇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사려면 집에서 나가. 당장. 지금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을 원한다면 기회를 줄 테니 나가. 그게 아니라 하나라도 종속이 되어 있을 거라면 내 말을 듣는 게 맞지 않아? 정신 차려 한순간 바람으로 네 앞길을 망치고 싶지 않다.”
어떤 자서전에서는 집을 나가 죽을만큼 고생한 다음 보란 듯이 성공한다. 마치 성공이 최고의 복수인 것처럼. 그러나 그런 강단이 없던 유약한 20대 중반의 남자는 주변에서 노력하듯 처음으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다행히 교육이라는 꿈을 가지기 전 계기가 되었던 것이 스피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메시지를 전하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다.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오히려 나의 꿈이 구체화가 되었다. 대학시절 잠자는 것 이외 가장 많이 했던 것이 스피치였으니 공들였던 시간이 그대로 쌓여 만들어진 셈이다. 그런 스치피를 준비하기 위해 가장 많이 했던 것이 원고 작성과 퇴고였다. 서류 전형과 면접 전형이 있는 취업이라는 녀석은 글 쓰는 것과 스피치에 자신있는 사람에겐 그렇게 큰 허들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대중매체에서 들어 본 적 있는 회사들의 공개채용 시점에 맞춰 이력서를 조금씩 수정해가며 제출했다. 정성으로 대여섯 번씩의 퇴고를 거쳐 만들어진 자기소개서는 각 회사로 흩뿌려졌다. 메일함에는 각 회사들에서의 회신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였고 모든 회신에서는 나의 뛰어남을 칭찬해주고 있었다. 단 회사와 맞지 않아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말미에 붙여서 말이다. 지인들에게는 사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했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이었음에도 왠지 모를 기대감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문득 새로운 곳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들었다. TV에서 들려오는 청년실업률이 귀에 맴돌았다. 학교에 다닐 땐 학년을 올라가는 것이 좋았다. 아니 바라고 바랐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가는 것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가는 것처럼 주로 시간이 해결해줬었다. 대학을 가는 것부터는 경쟁률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12년간 꾸준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긍정이 있었다. 그러나 1달이라는 시간을 준비하고서 첫 실패를 맛보고 나니 어질어질했다. 신문 지면에 있는 표본의 하나가 될 것에 두려움이 컸다. 이후 반년은 배워보고 싶은 컴퓨터 공부를 제외하고선(하루 8시간을 했지만, 아직도 컴퓨터는 어렵다.) 취업 준비에 시간을 썼다. 교육업을 하고 싶다고 준비했던 때보다 더 치열했다. 4년의 시간 동안 하고 싶던 일을 찾아 꾸역꾸역 해내 가던 20대 중반의 남자는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치열하게 해내고 있었다. 자소서마다 스무 번이 넘는 퇴고를 했으며, 사람들을 찾아가며 취업을 위한 자문을 구했다. 전공인 기계공학에서도 부족함이 없도록 기계기사를 준비하듯 공부에 매진했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첫 한 달을 부정하듯 시간을 때려 박았고, 쉬는 시간에는 시간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민했다. 다행히 세계적인 활황에 힘입어 기업들이 너도나도 사람들을 뽑아가는 시기가 훈풍이 되었다.
서류에서 다섯 군데나 합격 소식을 받았다. 이후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특히 면접에서는 수년간 해왔던 스피치 능력과 경험들이 빛을 발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도 서봤었다는 경험은 떨림을 잦아들게 했고, 뱉아진 한마디, 한 순가의 행동에 따라 순간순간 평가를 받던 스피치 대회의 경험은 말과 행동의 방향성을 잡아줬다. 수십 수백 번 카메라를 보며 연습했던
눈 맞춤은 한층 자신감을 표출해주었다. 그렇게 다섯 곳에 최종합격 연락을 받았다. 이제는 교육과 상관없는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엔지니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