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Oct 16.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45

9장 3일째 저녁

245.

 끔찍한 피비린내의 향연, 토막이 나버린 피지 못한 작은 몸의 친구들, 기억이라는 것은 몹쓸 것들을 머릿속에서 밀어낸다고 하는데 바위에 깊게 박힌 머릿속의 대지에 마구잡이로 거대한 삽을 이용해 그 기억을 물었다. 과정은 마동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거대한 삽은 마동의 몸뚱이 두 배나 되는 크기였고 그 삽을 들고 머릿속의 쇠말뚝 주위 땅을 파 들어갈 때면 마동의 작은 손이 견뎌내질 못했다. 손바닥은 이내 물집으로 가득했고 물집은 고집스럽게 형체를 유지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비웃기라도 하듯 터져버리고 말았다. 찢어지고 상처로 가득한 손바닥이지만 멈추면 안 된다. 뒤틀어져버린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오기 전에 얼른 묻어야 했다. 땅바닥은 삽으로 파 들어가기 전에는 말랑말랑하고 푸르른 대지였지만 막상 삽을 들고 땅으로 꽂는 순간 탕하며 삽의 날이 튕겨 나올 만큼 딱딱하고 견고했다. 대지의 힘은 인간의 나약함으로 어림없다고 말을 했다.


 인간은 그동안 많은 것을 훼손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더 이상 가질 것이 없음에도 양손은 이미 많은 것을 들여서 얼굴이 일그러져도 더 가지려고 했다. 탐욕스러운 것들!라고 대지는 말했다. 마동은 그런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지는 성적표를 받아 든 아이처럼 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동은 삽으로 마구 대지를 팠다. 손으로 쥔 삽의 기둥으로 손바닥의 물집이 터져 피와 끈적끈적한 액이 흘렀다. 마동은 쉬지 않고 대지에 구멍을 냈다. 구멍을 파내면서 나온 흙으로 마동은 쇠말뚝 같은 기억을 덮었다. 대지는 고개를 흔들며 졌다는 듯 나약한 부분을 마동에게 내주었다. 마동은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힘을 주어 대지에 삽을 내리꽂아서 구멍을 내고 또 구멍을 크고 깊게 만들었다. 구멍은 만들어질수록 불길한 전운의 얼굴이 번져갔다. 마동은 틀어진 기억의 상자를 꺼내서 구멍에 넣고 묻었다. 발로 단단하게 밟았다.


 마동은 그곳을 빠져나와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 모든 것을 잊었다. 비 온 뒤 촉촉한 숲을 달려서 덤불 속으로 달렸다. 가시가 몸을 찌른다.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술실의 매스처럼 가시는 팔을 긋고 허벅지를 그었다. 가시가 스친 곳은 이내 핏빛의 방울이 맺히더니 바람에 날려 옆으로 떨어졌다. 피가 떨어진 대지는 흥분으로 울렁거렸다. 마동은 달렸다. 이끼긴 바위를 밟고 달리다가 넘어졌다. 머리가 돌에 닿아 퍽 하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기증이 앞을 가렸지만 나는 다시 일어나서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가시덤불의 나무들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그들은 대지와 함께 아우성을 지르며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따갑게 느껴졌다.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창을 제거하고 앉아있는 기분. 나는 얼마나 달렸을까.


 바람의 냄새가 났다. 구토가 나올 만큼 선연한 냄새. 나는 이 냄새를 알고 있다. 바람은 후퇴한 시간의 냄새를 몰고 왔다. 냄새가 나를 쫓아왔다. 내가 아무리 빨리, 멀리 달려도 냄새는 나를 쫓아왔다. 냄새가 내 몸을 덮었을 때 암흑의 냄새로 바뀌었고 하늘은 암흑의 비를 뿌렸다. 시간의 전후가 바뀌려고 했다. 나는 암흑의 비를 맞고 울부짖었다. 달렸다. 더 힘차게. 멈출 수 없는 기차처럼.


 나는 비 때문에 앞의 구멍을 보지 못하고 그만 발이 빠져 넘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나의 젖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가시에 찔린 팔의 상처를 보듬었다.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의 감촉은 나는 알고 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을 뜨기 싫었다. 눈을 뜨면 그녀는 가버리고 만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부드럽고 차가운 감촉, 냉철하지만 온기가 퍼지는 손길, 나는 알고 있다. 손길의 주인공을.


 ‘당신은 바로 나예요’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 들린다. 귀에 살짝 입김을 후 불어주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 입술이 귀에 살짝 닿았다. 속삭임은 어느새 교성으로 바뀌고 나의 몸을 흡수한다.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교성만이 아니야. 나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는개가 있었다. 놀란 나는 는개의 상체를 두 팔로 붙잡았다. 순간 스르르 연자주색의 푸석한 먼지처럼 녹아내렸다. 아아, 난 어쩌지 못하는 결락의 끝을 맛보았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4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