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1. 정확하게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매년 보게 되는 영화들이다. 영화도 있지만 드라마도 껴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어떻든 참 좋다. 그리고 시즌 영화들을 다시 봐도 좋다. 역시 안 보면 섭섭한 영화는 '나 홀로 집에'다. 도대체 요즘은 왜 안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 티브이에서 하던 1, 2가 사라졌다. 매 년 욕을 하지만 서도 캐빈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낼까. 하도 봐서 뻔하고 뻔하지만 아는 맛이 무서운 것처럼 뻔해서 재미있다. 이제는 조카와 이불을 덮고 발을 이불 밖으로 빼고 크림빵을 먹어가며 보게 된 영화다. 캐빈! 올해도 겨울이 다가왔고 어김없이 사고를 쳐줘!
2. 아주 오래된 영화지만 그렘린 역시 재미있다. 시대를 풍미했던 피비 케이츠의 모습이나 인간을 닮은 그렘린의 좌충우돌 뉴욕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렘린 역시 1, 2로 나왔다. 그렘린 2에서 흉측한 그렘린들이 건물에 떼로 몰려 음악에 맞추어 뉴욕, 뉴욕을 부른다. 아주 재미있고 인상적인 장면이다. 기즈모라는 전설 속의 아주 귀여운 녀석인데 물이 닿으면 자가 복제를 하는데 그것이 괴물이 된다. 귀여우면서도 공포를 주는 몬스터가 나온 영화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티브이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겨울이 되면 찾아서 봐야 한다. 요즘의 영화에는 휴대전화가 온통 등장한다. 휴대전화 때문에 망하고 휴대전화 때문에 살기도 한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대의 영화 속은 조마조마함이 더 했을지도 모른다.
3. 크리스마스 영화에 개인적으로 또 빠질 수 없는 '폴라 익스프레스'도 매년 겨울이 되면 외투를 꺼내 입듯 찾아서 본다. 폴라 익스프레스를 타는 순간 모험의 길로 접어든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마치 어린 시절에는 동생의 몸과 나의 몸과 친구의 몸과 친구의 누나의 몸에 줄로 연결해서 우리는 이제 떨어지지 말자, 하며 기차처럼 동네의 골목골목을 다녔던 느낌이다. 어쩐지 폴라 익스프레스에 타고 있으면 무서운 곳으로 기차가 들어가도 그저 재미있고 흥미롭다. 호수를 지나 산속을 뚫고 북극성이 보이는 곳으로 쉬지 않고 달려간다. 그렇게 달리다가 한 번 멈추는데 사슴 떼들이 기찻길을 가로막고 있어서다. 폴라 익스프레스에는 몇몇 장면이 기억에 콱 박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아이들이 기차 뒤칸에서 노래를 부를 때다. 크리스마스에 늘 들리던 종소리가 어느 날 들리지 않게 되었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산타를 믿지 않는 의심쟁이 주인공이 폴라 익스프레스를 타고 모험을 겪은 후 산타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의심이 많을 때에는 벨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산타를 믿음으로써 그 소리가 들린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주인공의 동생도, 친구들도 더 이상 벨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주인공은 죽 듣게 된다는 이야기다.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은 처음에 꺼려졌던 폴라 익스프레스에 탔다는 것이다. 그 모험을 겪지 않고서는 믿음이 생겨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나왔다는 것이, 설령 집 밖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지라도 집 밖으로 나와서 폴라 익스프레스에 올라타기 위해 발을 내밀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살 때부터 산타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 가물거리는 생각의 끈을 잡고 확 당겨보면 아주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머리맡에 아버지가 산타 신발 같은 것을 놓고 가는 것을 봤다. 어른이 되면 대부분 산타를 믿지 않게 된다. 그것은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불변의 진리 같은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대부분'이라는 말은 완전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분명 주위의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산타를 믿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이 산타를 믿고 있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이다. 소위 몇몇 어른들은 거짓말처럼 아직도 산타의 존재를 믿고 있다. 그 사람들이 누굴까.
산타를 믿는 어른은 분명, 이 세계에 끼어서 살고 있다. 설령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런 어른은 반드시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타를 아직 믿고 있는 어른들이 누굴까.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하다. 그건 바로 폴라 익스프레스를 만든 로버트 저메키스 같은 감독이 그런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염 난 어린이들이 완전한 아이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아직 산타를 믿는 어른들은 많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만드는 어른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만드는 어른들, 아이들이 읽는 동화를 쓰는 어른들이 그렇다. 바로 수염 난 어린이들이다.
그 어른들은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마음을 몸에 지니고 있기에 아이들이 눈물 콧물 쏙 빼가며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엄마 목소리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아내인 레슬리 저메키스가 했다. 또 리더십이 강한 흑인 여자아이가 나오는데 노나 게이가 목소리를 했다. 노나 게이는 다들 잘 알겠지만 마빈 게이의 딸이다. 노나 게이는 영화배우인데 온전하게 드러난 영화는 없다. 매트릭스 시리즈에 출연을 한 것이 배우 생활의 전부다.
또 잘 알겠지만 마빈 게이의 죽음은 아직도 무성한 소문이 시달리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을 말리는 도중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총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에게 준 것이다. 마빈 게이 하면 무하마드 알리와 연결이 된다. 마빈 게이와 알리는 인종차별에 대적했다. 한 사람은 권투로 또 한 사람은 노래로 흑인 차별을 이야기했다. 마빈 게이는 노래가 너무 좋은데 마약 중독에 시달렸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에릭 클랩튼처럼 굴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빈 게이의 노래가 얼마나 좋으면 찰리 푸스와 메간 트레이너가 ‘마빈 게이’를 불렀다. 노래 제목이 그냥 마빈 게이다. 마빈 게이처럼 사랑을 하자는 내용이다. 첫 가사에서 중의적인 표현을 썼다. 마치 쳇 베이커는 약하디 약한 사람이다, 같은 말처럼 멋지게 쓴 것 같다.
폴라 익스프레스 마지막 장면에 에어로 스미스의 스티브 타일러가 나와서 캐럴을 록으로 부른다. 역시 모두가 알겠지만 리브 타일러의 아버지가 스티브 타일러다. 리브 타일러는 청소년이 되기 직전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라다가 티브이에 슈퍼밴드 에어로 스미스가 노래를 부르는데 스티브 타일러의 얼굴이, 특히 입이 자신과 너무 닮은 것이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내가 당신의 딸이야, 라며 스티브 타일러를 찾아가 말했고, 스티브 타일러는 받아들였다. 당시 팝스타는 자신의 아이인지 모를 아이가 수두룩 했고, 찾아오고, 아니라고 하고, 아무튼 난리도 아닌 시기였다. 그런데 악동 중의 악동인 스티브 타일러는 리브 타일러를 딸로 받아들였다. 중간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지만 생략한다. 리브 타일러는 에어로 스미스 영광의 앨범 ‘겟 어 그립’의 뮤직비디오에 처음부터 죽 나오면서 서서히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알라시아 실버스톤과 같이 뮤직비디오에 등장을 했는데 알라시아 실버스톤은 어쩐지 내리막길을 걸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노라 게이, 스티브 타일러 역시 어른이지만 산타를 믿는 바보 같은 어른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 투어를 돌며 첫눈에 반해서 같이 보낸 여자의 딸이 내가 당신 딸이라며 달려들 때 이것저것 이해관계나 부당한 일을 당한다는 것도 멀리하면서 딸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노나 게이 역시 주인공 흑연 여자아이로 완전 빙의가 되어서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어른이 되면 모두가 산타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비록 어린놈의 자식 주제에 산타를 멀리했지만 분명 아이 같은 마음을 가득 지니고 있는 어른들이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산타를 믿는 사람들. 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더불어 어른들의 마음도 촉촉하게 해 준다.
4. 왜 러브 액추얼리는 넣지 않느냐고 하는데 러브 액추얼리는 참 재미있는데 개인적으로 매년 챙겨보지는 않는다. 러브 액추얼리는 그야말로 영국 배우들에, 영국 사운드트랙의, 영국 소품- 요컨대 레인지로버, 재규어들로 가득한 영화다. 영국을 위한 영화인데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 않은 장면도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다. 샘으로 나왔던 토마스 생스터가 마의 호르몬 분출기를 잘 겪은 탓에 멋진 청년이 되었다. 나는 휴 그랜트를 참 좋아하는데 예전에는 휴 그랜트만의 오우, 오, 음, 하는 의성어 추임새 같은 것들을 영화를 보고 곧잘 따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휴 그랜트를 1이라도 닮았다는 말은 아니다. 휴는 영화 속에서 멋진 영국의 리더로 나온다. 위트 있고 엉뚱하고 신사적이고 골 때리는 수상으로 나온다. 휴 그랜트가 가슴이 뻥 뚫리는 대사를 영화에서 한다. 미국 대통령과 면담 후 기자회견장에서 그 장면이 나온다.
"관계란 단어는 많은 죄를 덮죠. 양국 관계는 악화됐습니다. (미국) 대통령께선 자국에 필요한 것만 취하려 들고 영국이 원하는 건(이때 나탈리를 쳐다보는 특유의 처진 휴 그랜트의 눈빛) 무시했어요.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스, 숀 코네리(안타깝습니다), 해리포터도 있고 데이빗 베컴의 오른발 아니 왼발도 있구요. 위협하는 자는 친구가 아닙니다. 힘에는 힘입니다. 이젠 영국도 강해질 겁니다. 미국은 대비해야 될 겁니다"
이 대사를 듣고 있으니 차인표가 떠오른다. 차인표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벌써 장편 소설을 두 편이나 냈다. 나는 그 두 편을 다 읽었는데 글을 참 잘 쓴다. 한 편은 영화가 되기도 했다. 좋은 내용이지만 망했다. 차인표는 피어스 브러스넌 주연 007에서 북한 장교 역할이 들어왔을 때 과감히 출세의 길을 포기해버린 일화가 있었다. 나라를 움직이는 정부의 관료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영화배우들이 국민들의 소리를 대신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배우들은 문화를 이루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제 일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브 액츄얼리에는 멍하게 보이는 눈을 가진 영국 청년이 가방에 콘돔을 잔뜩 넣어 미국으로 여자를 만나러 가서 아메리카 여성 세 명을 만난다. 그중에 한 명은 엘리샤 커스버트다. 5분 남짓 나오는데 섹시함을 뽐낸다. 엘리샤보다 10배 섹시한 데니스 리차드도 나온다. 그때 사운드트랙으로 더 콜링의 Wherever You Go가 나온다. 더 콜링은 미국 밴드다. 이 노래는 유명했다. 좀 더 노래가 영화 속에 나와도 될 법 한데 영국 영화라 그런지 미국 노래가 아주 잠깐 나온다. 더 콜링은 서태지의 팬이다. 서태지의 ‘아침의 눈’을 기타를 치면서 한국어로 부른 영상으로도 유명했다.
영화 마지막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독일 출신의 모델 ‘클라우디아 쉬퍼’도 나온다. 웨스트 라이프의 리메이크 노래 업타운 걸의 뮤비에서도 길쭉길쭉한 클라우디아 쉬퍼가 나온다. 영화는 마지막에 영화의 첫 장면인 히드로 공항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영국 청년이 데리고 온 미국의 섹시한 여성들이 보인다. 이렇게 대중은 인종과 국경에 상관없이 서로 공유하며 소통을 하는데 정치인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어요?라고 샘이 아빠인 니암 리슨에게 말한다. 이 대사를 들으면 '연애시대' 마지막 장면에서 은솔이가 한 대사가 생각난다. 세상에는 증오가 가득할 거 같지만 사랑이 곳곳에서 우리를 따뜻하게도 또 칼질하듯이 아프게도 한다. 증오보다는 사랑이 행불행을 동시에 전한다. 뜨거운 날에 따뜻한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5. 매년 겨울에 챙겨보는 영화는, 이건 영화는 아니지만 '말괄량이 삐삐'다. 요즘도 티브에서 방영을 하는데 성우가 다 바뀌어서 전혀 삐삐, 토미, 아니카 같지 않다. 삐삐가 할머니가 되었던데. 말괄량이 삐삐가 탄생한 64년도에는 세계 모두가 일변하는 격동기라 자본주의가 각 나라에 파고들어 뼈를 썩어 가게 만들고 있었다. 어릴 때만 보면 몰랐을 삐삐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권력구조를 파괴하는 구세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인들이 역사는 진실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평등해지고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기만 할 뿐이라 시인들은 목숨을 걸고 펜으로 자본주의와 국가권력에 맞섰다. 마찬가지로 삐삐의 작가도 그런 사유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알드 달의 마틸다처럼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탄생시켰다. 사랑스러운 삐삐, 정말 정말 좋아하는 삐삐. 말괄량이 삐삐는 현재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보고 나면 빠져들고 만다.
삐삐는 어느 날 빌라빌라클라 라는 큰 집으로 미스터 넬슨(원숭이)과 큰 말(이름이 생각 않남)과 함께 이사를 온다. 큰집을 동경하던 토미와 아니카가 그 집에 누군가 이사를 왔다는 소리를 듣고 가게 된다. 베개를 머리가 아닌 발로 베고 자고 온 집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의자를 치우는 것도 집어서 저쪽으로 던지고. 토미와 아니카는 자신의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을 삐삐는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그만 삐삐를 사랑하게 된다.
삐삐 속에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전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삐삐를 끝까지 고아원에 데리고 가려는 리사 아줌마와 경찰 두 명. 크림이라는 키가 크고 마른 경찰과 크레인이라는 뚱뚱한 경찰 그리고 악당(이라 부르고 딱하고 귀엽기만 한) 두 명이 나오는데 역시 뚱뚱한 돈과 작고 마른 부릉이 나온다.
그들은 삐삐를 괴롭히거나 삐삐의 금화를 훔치려고 하지만 늘 삐삐에게 당하는데 삐삐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조금 억지 같지만 이런 모습은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사유한 것처럼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이지만 사랑으로 대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그렇게 인간 이하의 짓을 하지 못한다는 깊은 통찰이 있다.
삐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른들의 세계, 자본주의에 저항을 한다. 토미와 아니카처럼 방학을 하고 싶어서 학교에 간 삐삐는 미스터 넬슨을 데리고 가서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는데 선생님만 넬슨을 싫어하고 아이들은 좋아한다. 삐삐가 학교에 가자마자 하는 말이 위대한 플라톤에 대해서 배우러 왔다고 한다.
삐삐가 사유한 플라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만 더 길어지니까 그만 하고, 선생님의 질문이 이어진다.
선생님: 오 더하기 칠은 얼마니?
삐삐: 모르세요?
선생님: 나야 알지 12잖니.
삐삐: 다 아시면서 왜 물어요?
선생님: 토미는 사과가 7개 있고 동생은 9개가 있는데 합치면 몇 개가 되니?
삐삐: 아유 그걸 다 먹으면 배탈이 날걸요. 그걸 왜 다 먹어요?
삐삐는 그리고 선생님에게 다른 질문에도 왜 그걸 알고 싶어 하느냐고 묻는다. 조금 억지 같지만 권력에 대해 그 누구도 하지 못하던 말이지만 삐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한다. 결국 삐삐는 갇힌 공간과 짜인 틀에 싫증을 내고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다. 그러면서 위대한 플라톤의 배움을 받으러 다시 올 수 있으면 오겠다고 한다. 플라톤에 대해서 알아야겠지. 플라톤은 길어지니 역시 넘어간다.
모든 장면이 재미있지만 삐삐가 처음 토미와 아니카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코를 파고 있으니 아니카의 엄마가 예쁜 숙녀는 코를 후비는 게 아니에요,라고 하니 삐삐가 “흐흐흐 그럼 예쁜 숙녀는 코를 후비고 싶을 때 어떻게 하나요?”라고 한다.
삐삐의 가장 큰 힘은 친화력이다. 적이고 아군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먼저 다가간다. 화엄경의 세계라 할 수 있는데 모두가 평등하고 그들도 삐삐에게 마음을 연다. 삐삐는 이상하고 틀에서 벗어나 자제가 안 되지만 결국 모두 삐삐에게 매료된다.
삐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놀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대로 해버리고 만다. 실천.
많은 철학가들이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 하지만 하루를 견뎌내기만 할 뿐 사람들에게 여유는 사치가 되었다. 삐삐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놀고 싶을 만큼 놀라고.
삐삐는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가 바라고 상상하는 모든 것을 한다. 달리는 기차에 뛰어내리기, 절벽을 타고 내려오다가 토미와 아니카가 떨어지니까 절벽에 그대로 붙은 채 아이들을 천천히 한 손으로 잡은 줄을 내려 준다든가, 바퀴 없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나무판자로 만든 비행기를 타고 비행을 하면서 화산을 통과하고, 침대로 만든 애드벌룬을 타고 여행을 하고, 접착제를 손발에 발라서 벽을 기어오르고, 통나무에 들어가서 강을 건너고, 해적들과 맞서 싸워 붙잡힌 아빠를 구해낸다. 이런 장면은 정말 미치도록 좋다.
마을에 겨울이 오고 빌라빌라클라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삐삐는 빌라빌라클라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쿠키를 백만 개 굽는다. 그것도 아주 예쁘게. 늘 씩씩하고 용감하고 친화력 무장한 삐삐지만 사실 외롭다. 슈퍼파워를 지녔지만 삐삐는 어리다. 삐삐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이다. 외로움을 받아들여서 생활하고 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인 삐삐는 너무 외롭다.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나 친구들에게 선물 50개나 받았다고. 한 없이 우울하고 외로운 삐삐.
그때 토미와 아니카가 동네 친구들 모두를 데리고 빌라빌라클라에 온다. 이 모습이 참 가슴이 따뜻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삐삐를 위해 선물을 준다. 선물은 아이들이 모두 돈을 모아서 삐삐가 좋아하는 트럼펫을 선물로 사준다. 삐삐가 아이들에게 이거 너무 고마워서 어쩌지, 하니까 토미가 말한다.
너만 좋다면 우리도 좋아.
6. 연애시대 마지막 장면, 유치원 생인 은솔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사랑이 뭘까?
연애시대는 매년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열 번은 본 것 같다. 커피프린스 1호 점도 그만큼은 보지 않았는데 연애시대는 겨울이 되면 한 번씩 찾아보게 된다. 연애시대는 소설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원작을 따라오지 못할 거리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걸 깨버렸다. 심지어 후에 일본판 연애시대를 봤는데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동진과 은호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했다. 연애시대가 원작보다 재미있고 좋았던 이유 중 큰 부분은 ‘연애시대 음악’이다. 그리고 이미 70%의 시나리오가 먼저 나와 있었다. 다른 드라마처럼 초를 다투며 시나리오를 쓰고 수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영화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연애시대를 관통하고, 배경이 되고, 연애시대 곳곳에 흐르는 음악이 연애시대의 강점이었다.
연애시대의 모든 음악이 사랑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영화음악을 노영심이 맡았기 때문이다. 연애시대는 한지승 감독의 작품으로 당시 한지승과 노영심은 부부였다.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 분위기가 의도하든 의도지 않든 연애시대에 녹아내렸다.
한지승은 광고를 기가 막히게 연출하는 감독이었다. 광고를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세련되게 연출했다. 탑기어 코리아가 시즌 6의 영상을 한지승 감독이 맡았는데 이전의 영상보다 훨씬 세련된 영상이었다. 마치 분노의 질주를 보는 듯한 앵글로 시청자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바로 한지승이 연출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뮤직비디오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슈퍼카들의 연출이었다.
피아니스트인 노영심의 노랫말을 보면 소소하면서 따뜻함이 오소소 내려앉은 무릎 담요 같다. 연애시대 모든 곡이 노영심의 곡으로 가사가 없는 곡들도 들어보면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다. 마음의 여린 부분을 건드리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데 그만 코끝이 시큰해지는, 그런 음악을 노영심은 만들었다.
그랬던 노영심과 한지승이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여 으샤 하며 연애시대를 만들었다. 연애시대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도 ‘사랑이 뭘까?’로 시작해서 스텝들과 고 김주혁도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 말을 하며 끝이 난다.
어른이 되면 어릴 때 꾸던 꿈이 사라지게 된다. 꿈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견디게 되고 어른이 되어 연애를 하면서 내일을 기대하고 꿈꾸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잘 버무린 기분 좋은 ‘연애시대’였다. 이후 한지승과 노영심은 이혼을 했다. 각자 열심히 영화 만들고 음악 만들고, 그것 또한 각자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겨울로 시작하여 봄으로 끝맺음을 하는 드라마 연애시대였다.
7. 3D 애니메이션 에비니저 스크루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은 저메키스의 2004년 폴라 익스프레스 이후 베어울프를 거쳐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를 보면 정말 실사처럼 만들었다. 십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생떼를 쓰며 만들어진 상업영화보다 훨씬 잘 만들었고 또 좋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만화를 왜 실사처럼 만들까, 라는 의문도 든다.
입 모양이나 머리카락이나 손짓이나 옷자락의 휘날림 같은 것들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술력의 발전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만화를 이렇게까지 실사와 거의 흡사하게 만들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에비니저의 조카인 프레드가 나올 땐 그 눈빛이나 얼굴의 비틀림이나 특유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움이 누가 봐도 콜린 퍼스의 젊은 시절이잖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 스크루지의 이야기는 어릴 때 책으로 읽고 많은 버전의 영화를 스쳐봤지만 그저 흘러가는 시간 대하듯 했는데 이 영화가 나온 후부터는 역시 적극적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해에는 여름에 볼 때도 있다. 여름에 겨울 영화를 보는 건 차가운 열대어처럼 묘한 기분을 준다. 규칙이나 법칙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마땅히 그러한 것에서 좀 어긋나는 기분이 묘함을 증가시킨다. 요컨대 그램린을 여름에 선풍기를 틀어 놓고 본다든지.
스크루지는 늘 혼자다. 옆에 사랑하는 벨, 가족이 있었지만 모두 떠나갔다. 인간은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할 때가 사실은 많은 것 같다. 책도 혼자 읽어야 하고 잠도 혼자 들어야 하고 글도 혼자 써야 한다. 밥도 혼자 먹는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행위에 속하는 것이고 누군가 대신 밥을 먹어 줄 수는 없다. 대신 아플 수도, 아파줄 수도 없다. 어쩌면 결국 밥도 혼자 먹는 것에 속할 수 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이브에 옆에 누군가 같이 있다면 꼭 안아주자.
이 영화는 우리가 다 아는 스크루지의 이야기를 초현실이지만 극사실주의적으로 잘 만들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매년 보게 된다. 촌놈이 상경할 때마다 한강에 한 번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스크루지의 영화가 있지만 짐 캐리의 스크루지가 가장 스크루지 같다. 이 스크루지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찰스 디킨스의 탄생비화의 영화도 있다. 그 영화도 정말 재미있다. 디킨스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올리버 트위스트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스크루지 영감과 그 속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볼 수 있는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의 서재'도 겨울에 볼만한 영화다.
8. 마지막으로 겨울이면 꼭 보게 되는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이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안 봤다면 그건 정말 지구인이 아니라고 까지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영화다. 오즈의 마법사는 제작사가 지금 보는 영화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에 들기까지 감독을 7번 교체한 것으로 안다. 아직 무성영화가 판을 치고 있었고 흑백영화의 시대에 컬러, 바로 ‘색’으로 영화를 말하고 싶었던 제작사는 그렇게 지금 보는 영화가 되기까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감독을 갈아치웠던 걸로 안다.
영화에 대한 뒷 이야기는 정말 많은 영화가 오즈의 마법사가 아닌가 싶다. 예전 방구석 1열에서도 나왔지만 처음 양철 인간의 분장을 했던 배우는 얼굴에 바른 페인트 같은 것이 폐로 들어가 폐질환을 일으켜서 다른 배우로 교체되었고 하수아비를 하던 배우는 허수아비처럼 보여야 해서 얼굴에 바른 지푸라기 분장을 떼어낼 때는 얼굴이 찢어지기도 했다. 배우에 대한 배려가 1도 없었던 시대였다. 도로시를 따라다니던 귀여운 강아지 토토는 배우들보다 출연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영화를 잘 보면 토토가 도로시가 마녀에게 붙잡혀 갔을 때 사자와 허수아비와 양철 인간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고, 마법사 오즈의 속임수도 알아내는 등 중요한 연기를 해낸다. 이 토토를 보고 세기적인 그룹 '토토'의 이름이 토토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이게 바로 컬러라는 거야!라는 걸 알릴 정도로 총 천연색의 컬러가 초반에 펼쳐진다. 현실은 세피아 톤으로 암울하고 힘들지만 오즈의 나라, 상상 속의 그곳은 아름답고 화려한 색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배우를 생각하지 않았다. 녹색 마녀인 엘파바의 분장도 독성이 강한 것으로 매일 했다고 한다. 무려 22주 동안 편집에 모든 인원이 매달렸다고 한다. 그때는 카메라를 들고 다닐 수 없는 고정식이라 모든 촬영을 실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래픽이 없었기에 특수효과를 만들어냈고 미니어처 기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30년대에 그렇게 해서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만드려고 하나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원이 충당되었을까.
그래서 전국에서 모집한 난쟁이들로 먼치킨 마을을 채웠는데 너무 힘들고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난쟁이 한 명이 목을 매달아 죽은 모습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그 장면은 후에는 편집이 되어 목 매달린 모습이 삭제되었는데 도로시 일행이 오즈를 만나러 가는 숲 속 저 끝에 그림자 형상으로 목을 매달고 있다. 그런데 자세하게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MGM에서 만든 영화로 영화 시작 전에 항상 사자가 크앙 하는 인트로가 있는데 ‘오즈의 마법사’ 이후 성공에 힘입어 영화 속 사자가 영화사의 인트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는 디즈니사에 이기려고 작정하고 만들었으며 먹혀들었다. 덕분에 도로시의 두 번째 후보였던 주디 갈란드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살이 안 찌게 하기 위해 하루에 담배 80개를 피우고, 갖은 약물과 성상납까지 하면서 망가졌다. 그 일을 부추긴 사람이 엄마였다. 영화 ‘주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디 갈란드의 처절한 삶을.
주디 갈란드는 노래를 정말 잘 불렀지만 늘 혼자라는 생각에 우울했고 결국 40세가 조금 넘은 나이에 욕조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오즈의 마법사를 언제 처음 봤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집중해서 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겨울이었다. EBS에서 해줬는데 보고 말았다. 입을 벌리고 집중해서. 원숭이들이 도로시 일행을 잡아서 날아갈 때는 정말 무서웠다. 어쩐지 오즈의 마법사가 더 스펙터클 해지고 스케일이 거대해지고 엄청난 캐릭터의 확장이 된 버전이 ‘호빗: 뜻밖의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볼 때마다 든다.
지금까지 겨울에 볼 만한 뻔한 영화들을 소개했는데 누가 읽을까 싶다. (웃음) 쓰고 보니 너무 기네. 그냥 한 편씩 올릴 것 그랬나 싶기도 하다. 오늘부터는 찬 바람이 불고 완연한 겨울의 기분이 드는 날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편성해본 개인적으로 겨울만 되면 다시 보는 영화들을 소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