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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27. 2021

비는 소바와 티라미수를 타고 8

단편 소설


8.


 “하지만 말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찾는 거예요. 열심히 그 물건을 찾다 보면 그 에너지가 분명 그 물건에게 전달되리라 믿고 싶은 거예요. 열심히 찾아서 없으면 어쩔 수가 없죠. 그렇게 열심히 찾아서 없으면 후회가 덜 하단 말이에요. 아시겠어요?”라며 나에게 자신의 말이 확실하다며 동의를 하라는 얼굴을 했다.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네, 알 것 같아요.”


 “정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내 주머니에 있는 볼펜을 꺼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래, 볼펜을 찾고 있었다면서 내가 내 주머니에서 꺼낸 볼펜을 마치 자기 볼펜인 양 낚아 채 만지더니 수첩을 들고 있지 않는 내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이로써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나의 볼펜이 그녀의 손으로 넘어가서 어떤 알 수 없는 의식을 거쳐 다시 내 손으로 넘어왔다. 기이했다.   

  

 시간의 냄새가 비 비린내를 뚫고, 나는 오래된 수첩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수첩과 볼펜을 가리켰다. 나는 얼떨결에 수첩을 펼쳐 빈 공간에 이름을 적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아직 사인 같은 것이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사인을 해 달라고 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나는 이름을 적어줬다.      


 사인이 없기 때문에.      


 왜 그런지 처음 만난 모르는 여성에게 건네받은 수첩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적는다는 것이 비정상적인 모습처럼 느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는 수첩에 적힌 내 이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약간 우쭐해졌다.


 그녀는 이게 뭐? 하는 표정을 짓더니 누가 사인해달라고 했어요? 하며 전화번호를 적으라는 것이다. 나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화번호는 왜 적으라고 하는지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수첩에 나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서 건네주고 말았다. 현실성이 희박해져 가는 상황 같았다.      


 나는 그녀와 그렇게 나란히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고도 없던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우리는 지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비처럼, 그녀도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 역시 내가 비를 한참이나 바라보는 것처럼 수첩을 건네받고는 비가 내리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깐의 침묵은 꽤 묵직하고 거대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나보다 두세 살 적어 보였다. 아니다. 세네 살 적어 보였다. 우리는 서로 나이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다. 사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얼굴에는 성숙미가 있었지만 순간 바라보면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썩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직감이 가지 않았다.      


 언뜻 비치는 그녀의 얼굴에는 영혼의 순수한 그림자 위에 세상의 풍파를 이겨낸 강인함이 있었다. 나는 하나의 사물이나 인간에 대해서 관찰하는 습관적 경향이 강한데 그녀는 관철 하기기가 적잖이 힘이 들었다. 그녀는 필요할 때마다 꺼낼 수 있는 여러 개의 나이를 가진 여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대단하거나 평범하거나, 직선적이거나 둥글둥글한 모습을 몽땅 지니고 있었다. 예고 없이 떨어지는 비가 그치면 여름이 급습할 것이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후에 들었지만 그녀 역시 여름을 좋아했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계절을 좋아했다.


 단지 모기만 뺀다면.      


 이 비는 계절을 알리는 경종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그녀는 지금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가 참 좋다고 말했다. 나도 이 노래는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내가 수첩에 적어놓은 연락처 밑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종이를 찢어 나에게 건네주었고 나는 덥석 받고 말았다.

     

 아날로그적이다. 나는 아까의 수모도 있고 이 여자에게 딱히 호감이 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 일인지 너무 수월하게 그녀가 하라는 대로 다 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나에게 한 번 웃어주고는 내 볼펜을 들고 그대로 빗속으로 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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