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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24. 2021

잡채

음식 이야기


잡채는 우리나라에서는 잔치음식의 대명사이다. 생일잔치나 돌잔치에 초대되어서 갔는데 잡채가 없으면 어쩐지 허전하다. 그렇다고 잡채가 있다 해서 매달리지도 않는다. 잡채는 언제부터 우리 밥상 위에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잘 갖춰 입은 재미없는 도련님 같은 느낌이다.


잡채는 맛있는 음식이지만 그 맛을 내기까지는 여러 실수를 맛봐야 한다. 자산어보의 변요한이 한 말처럼, 실수가 변명이 되면 실패가 되고 실수가 과정이 되면 실력이 된다는데 잡채를 맛있게 하는 사람은 그런 실수의 과정을 겪었기에 맛있는 잡채의 맛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잡채는 다른 음식과는 다른, 만드는 이의 스토리가 깃들여 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는 잡채를 아주 쉽고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서 따라 하면 비슷하게 맛을 낼 수는 있지만 일단 잡채에 들어가는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찮다. 당면은 찬물에 불려 놔야 하고, 고기는 밑간을 해주는데 간을 하려면 진간장, 설탕, 후추, 참기름, 마늘을 넣어서 밑간을 해서 볶는다. 시금치도 끓는 물에 데쳐서 물기를 또 바짝 짜야한다. 그리고 소금과 참기름 같은 걸로 또 밑간을 해준다. 버섯이나 당근, 양파도 볶아야 하는데 잡채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 같이 볶으면 안 된다. 버섯을 볶고, 양파를 볶고, 당근을 따로 볶아야 한다. 이렇게 잡채에 들어가는 재료가 다 준비가 되면 잡채를 비빌 양념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까다롭게 잡채를 만들어도 다른 음식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 처음부터 인기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치킨을 먹고, 피자를 먹고, 국을 먹고, 밥을 먹고 다 먹고 난 다음 술을 마실 때 안주가 더 필요하다면 잡채를 먹는다. 잡채는 분명 참 맛있는 음식임에는 분명하다. 맛있는 잡채를 맛있게 먹으려면 잡채만 오롯이 밥상 위에 오르면 된다. 잡채는 김밥처럼 적은 양으로 할 수가 없다. 집에서 김밥을 말 때 달랑, 한 줄만 말 수는 없다. 잡채도 마찬가지다.


고독한 미식가에서도 고로 상이 잡채를 아주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 한국 사람이 하는 가게에서 고로 상이 김밥과 함께 잡채를 먹는다. 고로 상이야 워낙에 음식을 맛있게 먹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잡채가 당장 먹고 싶다. 내가 사는 도시의 전통시장에 가면 먹거리 골목 한 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 잡채가 있다. 그곳을 지나가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기며 데면데면 앉은 아주머니들이 잡채를 호로록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배가 고플 때 그곳을 지나치면 앉아서 잡채를 사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잡채가 잔치상 위에서 다른 음식에 비해 약간 홀대를 받는 것처럼 수많은 식당이 있지만 잡채 전문점도 없다. 잡채만 파는 음식점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잡채에는 콩나물을 넣기도 하고, 돼지고기를 넣는 집고 있고, 소고기를 넣는 집도 있다. 잡채는 밥과 함께 먹는 사람도 있지만 잡채를 우유식빵에 싸서 먹어도 아주 맛있다. 잡채도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종류가 많아서 전문점에서 다루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잡채 전문점은 없다. 그러니까 잡채가 먹고 싶다고 해서 라면처럼 해 먹을 수도 없고 잡채 전문점도 없어서 쉽게 먹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잡채는 먹거리가 흘러넘치는 요즘 더 소외되는 게 아닐까. 잡채는 누구나 좋아하는데 아무나 먹을 수 없다.


잡채는 집집마다, 사람마다 잡채에 대한 추억이 있고 스토리가 있어서 잡채가 우리의 밥상 위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잡채를 먹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엄마를 떠올리는 사람,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식에 스토리가 입히면 그 맛은 두 배가 된다. 나에게 잡채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어릴 때 잡채가 밥상에 올라오면 나와 동생 앞으로 잡채 그릇을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잡채는 어린 시절에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잡채를 좋아하는 어린이들도 있겠지만 잡채도 어른이 된 다음에 맛있게 먹게 된 음식이다. 아버지는 자주 먹지 못하는 잡채를 자신이 먹고 싶었을 것이다. 어릴 때 친척들 결혼식에 가면 아버지는 잡채를 가져와서 맛있게 먹으며 맥주를 한 잔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전통시장 먹자골목의 잡채 거리에는 장 보러 온 어머니들이 앉아서 잡채를 호로록 먹고 있다. 잡채를 먹는 동안은 어린 시절에 엄마가 잡채를 해서 생일 상에 올려줬던 추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호호 거릴 수 있다. 잡채는 어른들 마음속에 아직 아이로 남아 있는 마음을 꺼내 준다. 아버지가 되고 나면 아이들처럼 먹고 싶은 걸 마음 놓고 아내에게 만들어달라고만 할 수는 없다. 특히 손이 많이 가는 잡채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들 생일에 잡채가 올라오면 다른 음식에 밀려 저 옆으로 빼놓으면 그제야 아버지들은 잡채를 맛있게 먹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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