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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07. 2021

일상은 강물처럼 흐른다

며칠간의 기록

요즘은 스텔라 장의 노래를 많이 듣는다.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을 듣고 있으면 가사를 어쩌면 이렇게 맛깔나고 아프게 잘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봄날에는 유발이의 노래를 들으며 스쳐가는 봄을 만끽했던 기억이 있다.


일상은 그야말로 강물처럼 흐른다. 강물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지만 절대 멈추지 않기에 어느새 저 위에 떨어진 연분홍빛 꽃잎이 강물을 타고 벌써 저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서서히 흐르는 것 같은데 금방 흘러 바다로 가버리고 만다.


4월 6일 화요일

나는 매일 같은 곳의 비슷한 사진을 찍는다. 아침에 커피를 투고하기 위해서 일하는 건물을 빠져나와 로컬 카페로 가면서 늘 이 나무를 찍어서 올리고 있다. 불과 한 달 전의 3월만 해도 아직 앙상했는데 어느 날 보니 녹음이 짙어졌다. 4월인 것이다. 4월의 마법이 온 세상에 펼쳐지고 있다. 까치의 집이 있는데 앙상했을 때보다 까치는 녹음 속에서 아주 기쁜지 분주하고 아침마다 노래를 부른다.

3월 21일 일요일

자로 잰 듯한 반복의 일상이지만 같은 곳도 매일 다르게 보인다. 날씨와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자동차의 소리, 바람 같은 것들이 매일 달라서 지루하지 만은 않다. 그저 이런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을 앞으로도 지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누군가가 아주 행복하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아주 많은 시간을 견뎌냈기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일주일 전에는 반팔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날이 좋았다. 나는 집 앞이 바다인데 근래에는 강가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강변은 바닷가보다 계절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강변에 핀 꽃들이 옷을 갈아입고 봄날에만 풍기는 기묘한 향을 맡는다. 그 향은 예전 싸구려 방향제 냄새 같기도 하고 등에 업혔을 때 나는 아버지의 작업복 냄새 같기도 하다. 봄이 되면 시각적으로도 그렇지만 후각과 머릿속 뇌까지 강타하는 봄의 마법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럴 때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봄에 풍기는 향을 맡는다. 강변에는 벚꽃은 없기에 상대적으로 상춘객들이 많지는 않다. 그저 강변을 산책하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나와서 봄날을 만끽한다. 이런 날은 정말 쉬지 않고 달리고 싶지만 귀로 들리는 스텔라 장의 노래도, 눈으로 들어오는 랜드스케이프도 후각적인 냄새도 나를 공중 부유하게 만든다. 이대로 팔팔 끓는 라면 속으로 들어가 풀어헤쳐지는 계란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고 만다.

하늘까지 겨울의 옷을 벗었기에 여러 가지 컬러를 지니고 있다. 숟가락이 있다면 저 중간의 한 부분을 아이스크림처럼 폭 떠서 아암 먹고 싶다. 파란 맛이 날 것 같은 하늘은 오늘도 멋진 그림을 보여준다. 나는 어떤 불안함 때문에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면 아주 많이 담아두려 한다. 이 멋진 모습을, 이 끝내주는 광경을, 이 좋아 죽을 것 같은 일상을 보며 한 컷 담아본다. 사진은 늘 내 생각의 반 정도도 못 따라오고 내 생각은 저 펼쳐진 하늘의 작은 부분 정도밖에 안 된다.

며칠 전에 비가 내렸다. 이렇게 예쁘고 아찔한 예술작품을 보여주는데 누군가 담배꽁초를 버려 놨다. 이런 모습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 나는 비흡연자지만 흡연자들의 입지가 너무 좁다. 담배도 기호인데 담배를 피우는 것이 타인에게 굉장한 피해를 주는 것으로 간주해서 모든 곳에서의 흡연이 이제 불가능해졌다. 식사 후 한 대를 피우며 작업능률을 올릴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기호가 어디 있을까. 기호로써 같은 동일선상에 놓은 것이 술인데 담배보다 술이 타인에게 더 피해를 준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술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만취자들의 음주운전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역시 담배가 더 악랄한 기호로 취급받고 있다.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도 흡연자들을 위해서는 식당 주인이 알아서 그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부분은 정부가 해줘야 하지 않을까. 거리의 찜통 같은 부스를 만들어 그 속에 흡연자들을 잔뜩 집어넣어서 담배를 피우게 하지 말고 식당이나 카페에서도 흡연자들을 위한 지원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은데, 어떻든 비흡연자인 내가 봐도 흡연자들은 마치 죄인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안타깝다.

비가 많이 왔던 날이다. 이런 날에는 우산을 들고 조깅코스를 걸으면 된다. 그러면 평소에 달리면서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다. 비가 오면 신기하게도(너무나 마땅하지만) 항상 무리 지어 둥둥 떠 있는 오리들을 볼 수 없다. 늘 하늘을 활공하던 기러기들이나 여타 새들도 볼 수 없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조깅코스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 중에서 재미있는 건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미간을 잔뜩 좁히고 타는 아저씨도 있고, 평소의 자전거 복장으로 묵묵하게 슉슉 거리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다.

비가 오면 세상의 모든 곳은 비에 젖는다. 강과 바다만이 비에 젖지 않는다며 자신 있는 모습이다. 봄비는 저 멀리서 그리움을 몰고 온다.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름의 비보다 덜 하고, 겨울의 비보다 더 한 그리움이 빗방울 끝에 달려 있다. 창가에 붙은 봄비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싫어서 악착같이 창에 붙으려 하지만 비가 떨어져 위에 쌓이면 창밑으로 주룩 흘러내린다. 그렇게 그리움은 밑으로, 밑으로 흘러내린다.

비가 실컷 온 다음 날, 아직 날이 화창하지 않은 흐리고 시린 날의 강은 마치 스산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어디쯤의 도시처럼 보인다. 비가 오지 않아서 오리들을 볼 수 있다. 오리들은 저렇게 무리로 몰려 있다가 한 두 마리가 물밑으로 꼬르르륵 들어갔다가 나온다. 오리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강가를 달리다 보면 한 1킬로미터정도 가면 또 다른 오리 무리들이 있는데 오리들은 무리가 모여 있는 그곳에 늘 상주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리들도 긴 거리지만 졸졸졸 이동을 하는 것일까. 오리들도 분명 텃새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재미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낚시꾼 세 명이다. 뒤에서 뭘 낚아 올리나 보고 있었다. 이 아저씨들은 서로 친구사이로 무엇보다 낚시의 초보다. 낚시를 몇 번 해보지 않은 아저씨 1(좌에서 우로)과 낚싯대가 없어서 지켜보며 훈수를 두는 아저씨 2와 1번과 마찬가지로 낚시 초보인 아저씨 3번으로, 이야기를 들어 보니 3번 보다 1번이 경력이 일주일 정도 더 먼저였다. 그런데 1번이 몇 번에 걸쳐 어렵게 던져 놓은 저 자리에 기가 막히게 3번이 계속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넓은 자리에 서로 각자 낚싯줄이 안 꼬이게 충분히 던질 수 있지만 아저씨 3이 던지기만 하면 아저씨 1의 낚싯줄이 있는 부분에 출렁하고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아저씨 2가 이런저런 말을 한다. 2번은 안 그런 척하면서 3번을 나무라고 1번도 썩 잘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야이 3번 새끼야 왜 자꾸 이쪽으로 던지노.“

“야 1번 놈아 내가 일부러 그러나.”

"저짜, 저짜게 가가 던지라 3번 놈아."

"옆에 다른 사람이 낚시하고 있다 아이가, 거기에 줄 걸리면 우짜노 1번 놈아."

“줄을 바짝 당기가 3번 니가 옆으로 좀 가가 던지라, 1번 니 폼 잡고 있지 말고 3번 좀 갈차줘라 "라고 2번이 말했다.

“2번 니넌 시끄랍다”라고 3번이 말한다.

“3번 놈아, 내쪽으로 던지지 말고 저쪽에 가가 던지라 마”라고 1번이 말했다.

그러자 아저씨 3이 아저씨 1번 바로 옆으로 와서 낚싯대를 던졌다. 그러니 두 대의 낚싯줄을 더 꼬이는 것이다. 그럴수록 아저씨들의 언성은 높아졌다. 고기를 낚아 올리는 시간보다 채비를 하고 준비를 하고 자리를 잡고 옮기고 미끼를 꽂아서 던지는 시간이 낚시하는 시간의 전부를 차지했다. 그 사이에 몇 번 던져봐서 친구들 앞에서 여봐란듯이 자신 있게 낚싯대를 던지는 1번 아저씨와 아직 몇 번 던져 보지 못했지만 구겨진 자존심은 하릴없고 의욕은 친구를 앞서는 3번 아저씨와 그 사이의 또 다른 2번 아저씨, 내 거친 생각과 또 다른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라는 가사가 생각이 났다.

이제 여기는 벚꽃이 거의 다 떨어졌다. 벚꽃은 늘 그렇듯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꽃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싶은데 그 모습을 보면 아찔해서 슬프고 아프다. 약이 있다면 왕창 복용하고 싶다. 꽃길이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면 그 길이 꽃길이 된다. 스텔라 장이 지금은 ‘어떻게 사람이 늘 사랑스러울 수 있어’를 부른다. 이 발랄하고 맑고 깨끗한 목소린데 아련하고 흐리흐리한 유리막처럼 불투명하다. 

봄의 꽃이란, 만개와 동시에 무화하는 벚꽃이란 그런 스텔라 장의 목소리를 닮았다. 어떻게 벚꽃이 늘 아찔할 수 있어, 무화되어 소멸하지만 내년에 또 이런 아찔함을 보여주는 벚꽃의 일상은 일 년을 주기로 영원을 이어간다. 화려할 때 사라지는 벚꽃의 아찔함은 혼란스럽다. 하지만 벚꽃의 혼란스러움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람직하게 혼란스러움이 나아가면 평범한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아름답고 격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비슷한 말을 어딘가 책에서 본 것 같은데 무슨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늘 그렇듯이 일몰은 아름답다. 예쁜 건 빨리 질리지만 아름다운 것은 쉽게 질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일몰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이다. 푸우의 말처럼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일어나는 것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누군가에는 행복일 것이다. 그러니 지쳐 쓰러지더라도 주저앉지는 말자. 겨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여리여리한 꽃처럼 죽기 살기로 피자. 죽을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게 삶이니까.

그렇게 달려 시장으로 들어오면 늘 요 녀석이 시장의 한 코너에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자주 보는 모습은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시장의 식당 아주머니에게 혼나면서 쫓겨나지만 또 보면 이렇게 자신의 터전 인양 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 영화 ‘고질라 대 콩'을 보면서 느낀 건데 괴수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위해 싸우는데 인간들은 탐욕을 위해 싸운다. 이 고양이 역시 자신의 터전이라 느낀 이 시장통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다. 대견하고 칭찬하고 싶다.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데 어떤 이름이 좋을까. 나는 길고양이들과 인연이 좀 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269

오늘도 받은 사랑은 또 꺼지고 하루가 가네요,라고 스텔라 장이 마무리를 한다. 시장의 골목에도 하루의 끝이 다가왔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그것이 마땅하지만, 그래서 몹시도 힘들기도 한다. 시작과 끝은 왜 있을까. 따위의 생각은 무용하지만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도 끝도 없는 곳이 소설 속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규정성을 비틀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 세계에 나도 속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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