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Dec 16.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6

단편소설



 "하하, 함고동 씨. 당신을 비롯해서 인간들의 문제는 인간만이 말을 할 줄 알고 세상의 제일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마다 다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소통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서 신이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제 일 순위를 내려주고 인간들의 생활 영위에 따라서 동물을 사육하고 포식하도록 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삶을 나아가기 위해 오래전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신은 인간과 제일 가까운 것이다.라고 짐작을 한 것이죠. 신이 어떤 형상을 띠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이 그저 신의 형상을 인간으로 본 따 만들어놓고 신과 인간의 동격화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신이 만약 지구 반대편의 인간보다 더 발달한 문명인들에게 당신들은 지구인보다 더 위에 있으니 만물의 영장인 지구인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조약을 체결해 버리면 외계인들이 지구의 여자를 종처럼 부리고 목줄을 채워 끌고 다니다가 불판 위에서 팔다리를 뜯어 구워 먹는 장면을 봐야만 인간들이 아,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게 될까요?"


 그는 그리즐리의 말에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리즐리가 말하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글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비슷한 영화를 봤거나. 그때에도 그는 금발의 섹시한 여자가 말라빠진 몸에 눈두덩이만 큰 외계인의 손에 개처럼 끌려 다니고 고어의 그림처럼 팔다리가 잘려 먹히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하하, 예, 압니다. 언어는 인간만이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제가 말하는 언어는 교류와 관계가 깊은 전달체계를 말하는 겁니다. 어찌 되었던 인간은 언어를 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결국은 말 때문에 멸망에 이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말 때문에 서로 총구를 겨누고 목숨을 앗아갑니다. 함고동 씨 주위에도 말 때문에, 말을 잘못해서 속앓이를 하고 사기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말을 아끼며 아무 말이나 하지 않는 함고동 씨를 믿어 버렸습니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걸러서 말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합니다. 우리 동물들은 정말 필요한 언어만 합니다. 우리 같은 곰이 좀 기이하기는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직면한 문제를 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릴 겁니다. 제가 당신을 믿는 것처럼 당신도 저를 믿어 보세요. 저를 믿는 마음이 들었다면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십시오."


 그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밖은 아주 깜깜했다. 요즘에는 저렇게 밤이 깜깜하지 않은데,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역시 83년도의 밤은 밤다웠구나. 창밖으로 보이는 밖의 검은 풍경 속에는 인공광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둠은 아름다웠다. 짙었지만 제대로 된 밤의 색이었다. 탁한 색이 혼합되지 않은 어둠, 오로지 어둠이었다.    


 그을린 밤공기의 빛이 이제는 퇴색되어 밤마저 잿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어둠이었다. 해프닝을 바라는 군상들이 모여 낮과 같이 만들어버린 밤의 세계가 가득해서 그는 밤이 되면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재의 밤에 비해 그가 바라보는 창밖은 그야말로 흑발이 가득했다. 기차는 그런 컴컴함을 뚫고 터득 터득 앞으로 나아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무지 마을이라든가, 가로등의 불빛이라든가. 강이라든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세차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창에 박혀있던 시선을 그리즐리에게 돌렸다. 그리즐리는 조금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그래, 괜찮아, 용기를 내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즐리 씨,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기대는 마세요. 전 아마 죽을지도 몰라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져갔다. 그리즐리는 그 큰 앞발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프지 않았고 큰 앞발이 움직이는데도 자연스러웠다. 열차는 간이역에도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잠이 들었던 사람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 그가 말했다.


 "지금 기차는 우리가 타고 있는 이 기차 칸 하나뿐입니다. 아까 함고동 씨가 창밖을 쳐다보고 있을 때 승객들은 다른 칸으로 이동을 했고 그 다른 칸은 원래의 철로로 목적지까지 잘 갔을 겁니다. 차장에게도 이 한 칸은 빌려야 한다고 말을 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가는 청량사의 축융봉까지 어떻게 가겠습니까. 봉화에 내리거나 안동에 내려서 그 새벽에 버스를 타겠습니까, 택시를 타겠습니까(그리즐리는 자신의 몸집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당신을 무서운 곰을 부리는 사람으로 본다거나, 저처럼 거대한 곰을 보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기차를 타고 축융봉의 밑까지 가는 것이죠. 그 밑까지 철로가 나있습니다. 아주 다행입니다."    


 뭐야, 이미 차장에게 말했다고? 언제 말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차장에게 기차를 빌릴 정도면 나에게 굳이 차표 값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잖아. 하지만 사정이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와서 표 값이니 83년도니 해봐야 눈앞에 곰이 말을 하는 상황에 무엇이 일어난 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괄태충의 형태를 만들어내느라 사고(思考)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기차는 쉬지 않았다. 소변도 마렵지 않았다. 한 칸이라서 그런지 반동도 심했고 터득 터득 거리는 소리가 묵직함에서 벗어난 듯했다. 물론 소리로 써가 아닌 느낌으로 말이다. 터득 거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는 것처럼 서서히 여명이 그 붉은빛을 저 멀리서 드러내려고 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산이었다. 아주 깊은 산속 같은데 기차선로가 놓여있었다. 실지로 선로가 놓여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즐리는 목적지에 가까워 오자 말수가 줄어들었다. 목소리 톤도 한껏 가라앉았고 긴장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리즐리는 그에게 자신의 그러한 긴장을 전달하지 않으려는 듯 미소는 여전히 머금고 있었다. 그와 그리즐리는 긴장된 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 괄태충과의 격투를 생각했다. 괄태충이라. 일단은 달팽이 과에 속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을 것이다. 달팽이는 자웅동체라고 그는 알고 있었다. 습한 곳에 서식하며 연갈색의 미끄덩거리는 점액질로 뒤덮여있는 그것의 크기가 아주 크다고 단정 지었다. 그 외에는 거대한 괄태충에 대해서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전투기가 지나가듯 잠시 형상이 생성되었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