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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01. 2021

런던 팝에서 17

단편 소설


17.


 치론이는 고등학교에서도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 교복 안에 러닝셔츠만 입거나 속옷을 아예 입지 않는 아이들과는 달리 교복 안에 늘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대중목욕탕은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느 시점부터 말이다. 치론이는 지성인의 반열인 대학생이 되고부터 보이지 않는 폭력과 드러나지 않는 차별이 더 심하다는 것을 나에게 토로했다.


 “세상에는 옳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주 순수한 사람이지. 그건 꼭 아이와 같아. 아이는 언제나 정직하게 말을 해. 순수한 것, 깔때기가 없이 말을 해버리고 나면 옳은 것은 그대로 악이 될 수 있어. 순수하고 옳은 것은 악이 되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 상처는 결국 칼이 되어 돌아오게 돼. 굳게 잠긴 과거의 잔상을 나는 놓아줘야 할 것 같아. 세상의 동사는 그대로 멈춰버렸고 형용은 뿔뿔이 흩어지고 변해버렸어. 나는 형용이 되고 동사가 된 것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치론이의 존재는 점점 희박해져 갔다. 재미있는 만화가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치론이는 정체성의 무모순성이 커져갔다. 치론이는 자신이 믿고 있던 내부의 감정이 점점 흐트러지는 것을 격렬하게 느꼈다. 그 느낌이 땀처럼 몸에서 비어져 나왔을 때, 지성인들은 지성인답게 치론이를 울타리 밖으로 내 몰았다. 치론이를, 치론이라는, 치론이기 때문에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잘못된 형태로 의미를 두었고 그 형태는 점점 악으로 내몰았다.     


 여름방학에 집에 누워 있는데 전화가 왔다. 무척 무더운 날이었다. 욕이 나올 만큼 더웠다. 에어컨이 집에 없기 때문에 눈을 뜨면 나는 바로 워터 덕에 갈 요량이었지만 그곳의 에어컨도 사정이 시원찮았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방에 누워서 움직이지 않으면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더위를 조금 피할 수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지 전화는 요란하게 울어댔다. 전화를 받으러 가는 동안 움직이면 등에서 땀이 밸 것이 분명해서 꼼짝하기 싫었지만 전화에 신경을 쓴 덕분에 움직이지 않아도 엉덩이와 등의 땀이 옷과 살을 찐득하게 만들었다. 더운 날씨였다. 전화를 받으니 치론이었다.


 “우리 집에 와. 맥주나 마시자. 요리도 했어."

 “밖에 너무 더워."

 “우리 집에 에어컨 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잽싸게 버스를 타고 치론이네 집으로 갔다. 포거동 복개천 위에 치론이네 집이 있었다. 치론이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냉기가 찰 지게 흘렀다. 어디서 배웠는지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치론이네 집안 가득 풍겼다. 보통의 집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또 다른 고소한 냄새였다. 치론이는 여동생과 단 물이 살고 있었다.


 “여동생이 있었어?"


 사실 파스타를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맛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늘 먹던 라면이나 칼국수와는 달랐고 냉면과도 달랐다.


 “응, 이제 중학교 3학년인데 오전에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방학하기 한 달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데. 그래서 집으로 연락이 왔더라고."


 치론이의 말에는 꽤 많은 상념이 묻어났다. 치론이의 집에는 음식 냄새가 풍기고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했지만 사람의 들숨과 날숨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파스타를 먹었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시장에 갔다 올게, 하고 난 뒤 영화처럼 아직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일을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정도 집에 올뿐이었다. 낯선 파스타와 치론의 이야기 사이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저 파스타를 배운 대로 포크에 돌돌 말아 입안으로 밀어 넣어서 먹는 것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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