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집
이승환의 1집은 사라졌고 2집은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째서 같이 묶어서 구석에 두었는데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남아있을까. 사라지는 물품은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서 찾아보면 도망가 버리고 만다. 아아, 나는 주인인 네가 싫어, 너무 싫단 말이야, 라며 어느 날 찾으면 없어지고 난 후다. 이승환의 노래는 학창 시절에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일찍 들어와 라면을 하나 끓여 먹은 후 누워서 마당이 겨울의 추위에 표백되는 것을 보며 들었다. 그래서 이승환 2집은 겨울의 노래, 계절송처럼 되어 버렸다. 기이하지만 여름에는 들어지지 않는다.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기이하다. 배도 부르고 볼 거라고는 1도 없는 마당인데 그만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멍하게 마당 뷰를 보며 이승환의 노래를 몇 번이고 돌려가며 들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행복은 순간의 기억이고 기억은 희미해질 뿐이라, 그때 그 순간의 희미한 행복했던 기억은 지금 그때의 음악을 들으며 조금 느껴볼 뿐이다. 1집에서도 그랬지만 2집도 이별, 헤어짐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트랙의 맨 처음의 가장 유명한 노래 ‘너를 향한 마음’은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언제라도 내게 돌아오기를 바보처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어리석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마음이라는 건 머리와 다르게 사고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또 너를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변한 그리움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까지 내려왔다. 우리는 애틋하고 애달픈 이런 마음을 죽을 때까지 질질 끌고 가야만 한다. 나의 마음이 이렇다고 들리지 않는 너에게 말한다.
어쩌면 이 노래가 가장 유명한 노래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승환 하면 공연에서도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을 부르니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알 수 없던 그때 언제나 세월은 그렇게 잦은 잊음을 만든다 해도 우리의 마음에는 정들은 그대는 어쩌면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어 ‘정’이라는 말도 참 좋다. 정들자 이별이네, 같은 말을 예전에는 많이도 했다. 소설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초코파이 광고에서도 ‘정’이 있었다. 영어로 해결되지 않는 단어 ‘정’. 정든 날에 대해서 노래는 말하고 있다.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난 기다림을 믿는 대신 무뎌짐을 바라겠지. 세상을 살아가고 삶에 부딪히다 보니 무뎌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 무뎌지는 건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이 노래는 도입이 마치 소설의 첫 시작처럼 출발한다. 입김처럼 흐려지는 먼 기억의 끝을 찾아 붙들고픈 마음으로 멍해진 내 모습, 시간은 나를 두고 저 혼자만 가버렸나, 하릴도 없이 흘러간 세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이야기도, 모두가 흐르고 변하는데 나만 그곳에 머물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픔을 말하고 있다. 잎진 가로수 아래에는 부서진 추억과 낙엽만이 쌓여 있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마음이 너무나도 애절하다. 무엇보다 이승환의 초기 목소리로 덤덤하게 부르기 때문에 더 애틋하게 들린다. 회상이 지나간 오후에는 그저 부질없고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이 노래에는 철학이 깊게 배어 있다. 나의 슬픔 속에는 떠나버린 그들의 수많은 외로움이 있어서 고민을 하고 사고해도 진실에는 접근할 수 없다. 추억만 남아있는 삶 때문에 웃어 본 지도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시인 여림의 시도 스쳐 지나가고, 기형도의 정거장에서도 떠오른다. 정거장은 늘 배경이 되는 내 몸이며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갈 뿐이다.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 쓸쓸하고 황망한 정거장에서 나는 기형도를 노래한다. 정거장에서 나는 고립을 먹고 희망을 노래한다. 모두가 빠져나간 정거장에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한다. 어디에도 갈 데가 없는 이들에게 고한다. 닳고 허물어져 가는 내 육체에서 머물다 가라고.
하숙생은 최희준의 노래를 이승환이 빠르게 다시 불렀다.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지금 들어서 더 좋은 것 같다. 인생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하게 하니까.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우리는 놓여 있는 작은 존재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도 죽고 나면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정일랑 두지 말고 미련일랑 두지 말자고 노래를 부른다. 이 처절하고 고풍스러운 노래를 이렇게 템포를 달리해서 불러 이상할 것 같은데 들어보라. 얼마나 좋은지.
1집의 가을 흔적처럼 2집에서는 숨은 노래가 슬픔에 관하여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면 2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곡처럼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내용을 파보면 사실 지질한 이야기다. 도입부의 전주가 참 좋다. 시작을 알리는 연주가 꼭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이 노래의 특징이라면 ‘어찌 살아갈런지~’ 다음에 바로 ‘하지만’으로 쉬지 않고 이어지게 부르는 게 포인트다. 자칫 다른 노래들과 비슷해서 잊힐 수 있는 노래일지도 모르는데 포인트 때문에 이 노래가 계속 불러진다. 그걸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사도 시적이고 노래도 의외로 높게 불러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들도 좋다. 특히 '이 밤을 위로' 같은 노래도 계속 부르게 된다. 그저 듣게 되고 한 번 들으면 계속 듣게 된다. 그리움 속으로, 그리웠던 곳으로, 그리운 사람에게로 데려다준다. 노래는 분명히 그런 기이함을 가지고 있다. 노래라는 것은 이상하게 꼭 나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것 같고, 나의 마음이 들켜 버린 것 같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음을 붙여서 불러준다. 그러다 보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https://youtu.be/7pzQr72ZOBA
코로나 전 이승환의 콘서트는 작정하고, 몸을 만들어서 가야 한다. 이승환은 공연이 끝나면 발이 부어서 신발이 벗겨지지 않을 정도인데, 길게 몇 시간씩 해서 그렇다. 팬들의 고령화를 고려해서 쉬는 시간도 있지만, 더 신나고 길게 터져라 공연을 펼친다. 록스타 적인 이승환도 좋고, 이렇게 발라드 적인 이승환도 좋다. 언젠가 코로나가 끝이 나고 이승환의 공연에서 또 열심히 몸을 움직이려면 신체를 만들어놔야 한다. 그저 어물어물 보내다가 이승환의 공연을 가게 되면 한 시간이 지나면 주저앉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