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Nov 04. 2022

슬픔은 더디게 온다

슬픔은 그렇게 온다








내가 입대를 해서 훈련소에서 조교들에게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을차례는 많이 받았다. 5월 군번이었다. 중순에 가서 6주 훈련을 받는 동안 여름이 왔다. 무지하게 땀을 흘렸고 매일 샤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내무반에서 암구호를 잊어버리는 녀석이 있어서 점호가 끝나고 전부 그 여름에 야상을 입고 장갑을 끼고 복도 끝에서 복도 끝까지 네발로 엉금엉금 걸었다. 팔이 다리보다 짧으니 복도를 두 번 왕복하고 나니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웃거나 힘들어도 일어나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조교가 딱 버티고 있으니까.


30분인가 40분 정도를 하고 난 다음 땀을 비처럼 흘리고 기진맥진했을 때 을차례가 끝이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조교가 목욕을 시켜 주었다. 그런데 정말 힘들었던, 그러니까 공포에 질려서 너무나 무서웠던 을차례가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중대 전체가 을차례를 받았는데 중대장이 직접 화를 냈다. 매일 시원하게 목욕을 할 수 있던 그 목욕탕이 공포의 장소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대장은 내무반 별로 목욕탕에 우리는 넣었다.


처음에는 탈의실에만 우리를 넣는 줄 알았는데 목욕탕 안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여러 내부반을 차례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점점 애들이 1자로 서게 되었다. 벽으로 벽으로 몸을 밀착하게 되었는데 점점 밀려오는 아이들 때문에 초반에는 재미도 있고 냄새 때문에 키득키득거리던 아이들이 점점 몸이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힘들어했다. 몸이 다른 애의 몸과 몸에 끼여 압박을 당하다 보니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끼여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중대장은 계속 잘할 수 있냐고 했고 우리는 대답을 했지만 목욕탕 안을 울리는 건 아이들의 신음소리뿐이었다. 고통에 겨워 목에서 겨우 쥐어짜 나오는 듯한 신음이었다. 몸이 짓눌리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그에 따른 공포로 너무 무서웠다. 단지 무서웠다, 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다리가 다른 아이들의 뼈와 뼈에 짓눌려 감각이 없어지는 느낌,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공포, 심장이 이대로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청났다. 군생활 통틀어, 화생방까지 해서 그때 그 목욕탕에 꽉 끼이면서 받았던 을차례가 가장 무서웠다. 그 공포를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다. 그런 공포는 처음 겪었기 때문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말하는 걸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매일이 소란스럽고 전쟁 같지만 엄마는 오늘도 나에게 온 선물 같은 너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고. 여기저기서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산다고 하는데, 내가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교감하며 낳은, 나에게 온 이 세상의 가장 크고 위대한 선물이 나의 자식인데 그의 엄마로 불리면 좀 어떠리. 이 지옥 같고, 이 전쟁 같은 세계에서 나의 딸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 비록 괴물일지라도 나는 나의 딸을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겠다.


나의 여동생은 조카가 생기고 난 후 그 이전의 자신의 생활 모든 것을 버리거나 바꾸었다. 조카가 태어나고 1년 정도 우리 집에 있었는데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늘 같은 자세로 옆에 누워 자는 조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지치지 않고 조카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린 조카가 어린이 집에서 다리를 절면서 집에 왔을 때, 그리고 병원에서 구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여동생은 전사가 되었다. 의사의 소견서, 경찰, 보건소 등등. 어린이 집 엄마들과 함께 어린이 집 추궁에 들어갔고 쉬쉬하던 어린이 집의 비밀을 밝혀냈고 그 어린이 집은 폐쇄되었다. 조카 같은 아이가 몇몇 있었다. 그 아이들의 엄마와 아빠들은 모두 상처를 떠안게 되었다.



수요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철수는 오늘’ 코너에서는 [그 사람이 남겨둔 모든 것이 생생하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곁에 없다. 그 사람의 부재는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견디기가 어렵다. 이런 걸 슬픔이라고 부르는 걸까. 아니다, 이건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에 가깝다. 믿을 수 없어서,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한 것 같아도 납득하거나 투영할 수 없어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도통 뭐가 뭔지 몰라서 머릿속은 자꾸 하얘진다. 누가 와서 말해주면 좋겠다. 이게 꿈속의 일이라고.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된다고.


철수는 오늘 상실의 슬픔은 빨리 잊거나 덮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견디기 어렵다고 애도를 생략하거나 축소하는 건 죽음과 상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더 이상 곁에 없는 그 사람, 참을 수 없을 만큼 정직한 부재. 뒤늦게 밀려오는 더딘 슬픔. 황동규 시인은 시집 ‘꽃의 고요' 곳곳에서 너무나도 더디게 마냥 더디게 왔다가 가는 슬픔을 보여준다. 슬픔이 얼마나 더딘지 자신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 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있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 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슬픔은 늘 그렇게 한 박자 늦게 와서 불현듯 뒤통수를 치고 만다. 이제 유통기한 다 지났다 싶어 방심할 때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불시에 사람을 사로잡고 만다. 나흘 몸살에 계속 어둑어둑해지는 몸으로 괴괴한 저녁을 맞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세상에 아무리 화내도 그의 실핏줄은 캄캄하고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그의 귀엔 텅 빈 바람소리뿐이다.


어제 첫 발인이 시작된 뒤, 오늘도 희생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았다. 한줄기 바람에 준비 안된 푸른 잎들이 날려가듯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삶의 끝을 채 못 보고 저 하늘로 날아가버린 그 사람. 그 사람이 남긴 더딘 슬픔은 이제야 겨우 발을 떼고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슬픔이라는 건 생활에서 멀리해야 할, 기쁨이나 좋은 것에 비해 그렇지 못한 것으로 배우거나 알고 있다.


슬퍼하지 마, 이거 먹고 잊자, 저거 하면 슬픔을 좀 잊지 않을까?


지내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에 들어온 이 더딘 슬픔이 잊어지지 않는다. 슬픔은 꼭 더디게 오고 그렇게 마음을 점령한 슬픔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슬픔의 감정을 몹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기쁜 감정이 행복한 것은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사이더 아웃'에서 슬픔이는 가만히 곁에 있어준다. 그리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 번 안아준다.


이번 사태에, 또는 누군가의 영원한 부재 때문에 슬프다면 열심히 슬퍼하자.

그건 인간이라는 증거니까.

그렇다고 덜 아프고, 더 아픈 것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

슬픔은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랑하는 이의 부재 때문에 오는 슬픔이라면 더디게 온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슬픔 덕분에 부재한 존재를 오랫동안 느끼니까.




마이클 잭슨의 얼쓰 송 https://youtu.be/XAi3VTSdTxU

영상출처: Michael Jackson


매거진의 이전글 크리스마스에 부추전을 먹었던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