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동은의 서늘한 표정이 좋다. 심지어 웃을 때에도 웃음 밖으로 그 서늘함이 흘러나와 주위가 싸늘한 영하권이 될 것만 같은데 그 분위기, 그 서늘함이 좋아도 너무 좋다. 가해자의 공모와 피해자의 공모 중에 더 나은 쪽은 어디일까,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 중 더 위험한 쪽은 어디일까. 여기서 말하는 위험은 같은 편 끼리의 배신을 말한다.
기캐 박연진의 모습을 두고 실제 기상 캐스터들이 글을 올렸다는데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한다. 너무 몰입하면 좀 그래. 최혜정의 모습을 보고 승무원들이 들고일어나야 하고, 갑부집 자식들은 내내 눈을 희번덕 뜨고 강압적으로 매일매일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대사들도 함축이 가득한 소설 속에서 할 법한 대사들이라 온통 상징적이며 복선이 가득하고 떡밥이 시즌 1에 다 깔려있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한다.
문동은의 이 서늘하고 차갑고 냉동고 같은 복수극에 로맨스가 시즌 2에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문동은이 복수를 한다고 했을 때 그러면 안 된다거나, 그러다가 다친다거나, 복수는 쉽게 되는 게 아니니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보다, 양호선생님처럼 18세의 문동은도, 36세의 문동은도 응원한다, 긴긴 시간이 될 테니 복수해서 꼭 이겨,라는 말이 훨씬 낫다.
김현남의 래미안 구운 계란 이마 깨트리기에서 웃음을 참는 동은의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지만 이 선을 넘어가지 말았으면 좋겠고, 시즌 2에서는 더 서늘하고 더 냉정하고 더 하얀 악마가 되어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복수를 해줘 문동은.
동은의 이야기가 16부작으로 쭈욱 늘어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시즌 1로 동은의 서늘하고 태양빛에 바짝 타들어가는 복수로 끝냈어도 되지 싶지만 시즌 2에서는 더 확장된 복수극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시즌 1에 떡밥을 많이 뿌려놨다.
다른 쓰레기 친구들에 비해 기캐 박연진의 집안은 뭘 해 먹고 돈이 많은지,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지 애매하게 나온다. 그래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박연진은 아버지가 안 나온다. 박연진의 엄마는 돈이 많다. 박연진의 엄마는 권력도 쥐고 있다. 박연진의 엄마는 점집을 젊은 시절부터 들락거렸다. 박연진이 고등학교 때 사고를 치면 빼내주던 경찰이 있었다.
박연진의 엄마는 경찰이 마련한 모텔에서 모종의 거래를 하거나 알선한다. 경찰은 박연진이 부탁한 것을 말해주려 굳이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박연진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 전화 통화로도 될 것을 박연진을 불러내 얼굴을 보며,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 이 드라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처럼 대조, 대치, 대비로 이루어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흑과 백, 미신과 기독교, 진실과 사실, 친부와 생부.
박연진의 딸은 색맹으로 아이의 아버지가 하도영이 아니라 재준이다. 박연진 또한 엄마와 헤어진 아빠의 딸이 아니라 엄마와 어떤 남자의 딸일지도 모른다. “난 또 울 엄마와 잤는 줄” 박연진은 경찰과 자주 만난다. 경찰이 박연진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다. 박연진의 얼굴을 보려 불러내는 것이다.
다음, 손명오는 죽었다. 재준의 명품 숍에서 죽었다. 죽음을 당했다. 누군가에 의해. 아주 짧은 순간 손명오를 죽인 여자가 녹색 힐을 신고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후로 박연진이 녹색 힐을 신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녹색 힐을 신고 발등의 산처에 밴드를 붙인 장면도 나온다. 그러면 손명오를 죽인 범인이 박연진이겠거니 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재준의 명품 숍에서 피칠갑을 하며 손명오가 죽었는데 깔끔하게 뒤처리를 했다. 깨끗하게 공간을 정리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자는 누굴까. 그 첫 번째는 경란이다. 경란은 학교 때 동은의 대체제로 피해자가 되어 현재까지 시에스타에서 여전히 재준과 박연준의 따까리를 하고 있다. 시즌 1에서 존재감이 덜 하지만 경란의 시선이나 불안한 표정 그리고 동은만큼 피해를 입은 경란이 뭔가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냈다. 경란은 시에스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동은처럼 복수의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손명오를 죽이고 난 후 뒤처리를 깔끔하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손명오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를 시즌 1에서 찾기는 애매하다. 동은과 경란은 학생 때 친한 사이였다. 재준이가 자신을 색맹이라고 놀린 반 친구를 떡실신시킬 때 문밖에서 동은의 팔짱을 끼고 같이 보던 친구가 경란이었다. 동은이가 구두를 신으러 와서 손명오가 시에스타 편집실에 따라오라고 할 때 경란은 동은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애초에 동은은 경란을 찾아가서 내가 복수를 할 텐데 동참하지 않을래?라고 했을 수도 있다. 만약 피해자의 연대에 경란이 참가했다손 치면 동은의 계획에 쓰레기들을 한 번에 죽이는 계획은 없다. 동은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게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손명오가 박연진의 자백을 잡아서 방송과 인터넷에 그걸 뿌려 매일이 지옥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말이다. 과연 경란이 손명오를 죽였을까.
사라는 약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손명오를 죽이는 장면을 옷장에서 봤다. 하지만 약 때문에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 단지 무의식 속에 녹색 힐이 있기 때문에 그림으로 표현을 했다. 그 녹색 힐을 신을 수 있는 사람. 그 힐이 맞는 사람. 박연진이 그렇고 또 한 사람이 더 있을 수 있다. 그 힐이 맞는 사람은 어쩌면 박연진의 엄마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가해자들의 연대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막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혜정이는 동은에게 발목이 잡혔고 손명오는 죽었고 재준이나 사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 배신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다.
만약, 만약 박연진의 엄마가 살인마라면. 그렇다면 동은은 박연진뿐만 아니라 박연진의 엄마까지 상대를 헤야 한다. 그러나 박연진의 모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의 악, 박연진 그 위에 있는 사람이 박연진의 엄마다. 시즌 1에서 박연진의 엄마가 가해자 집단 중에서 가장 강력한 빌런이었다. 문동은이 박연진과 엄마까지 상대해야 한다면 박연진 엄마가 거느리는 권력, 즉 힘에 대항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문동은이라 해도, 아무리 20년을 복수를 위해 준비를 했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해자 연대, 어벤저스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토니 스타크처럼 엄청난 조력자가 나타나 문동은의 뒤를 받쳐줄 것 같다. 그 인물이 에덴 빌라의 주인, 에덴 부동산의 주인 할머니가 아닐까. 빌라의 주인은 문동은이 에덴 빌라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손숙은 문동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에덴 빌라의 옥상은 온통 꽃밭으로 그야말로 에덴동산이다. 그 속에서 손숙은 문동은과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싼값에 문동은에게 집을 내주고 문동은이 세명 초등학교에 올 거라는 것도 안다. 고개 숙인 나팔꽃과 고개 든 나팔꽃 이야기를 하며 천사와 악마에 대해서 복선을 깐다. 손숙이 옥상에서 화분을 깨트리는 장면에서 윤소희가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와장창 부서지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손숙은 윤소희의 할머니일지도 모른다. 소희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이 아닌데 자살로 꾸며졌다는 걸 알게 된 손숙은 문동은을 도와줄 피해자 연대 중 가장 큰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박연진의 엄마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즌 2에서는 문동은의 복수 이외에 여정의 복수도 그려지지 않을까 한다. 여정은 아버지를 죽인 사이코패스의 모습이 자기 주위에 환영처럼 늘 나타난다. 정신과 상담을 통해 치료를 받지만 치료가 되지 않는다. 발포 비타민이 물속에서 녹으면서 내는 소리는 늘 나타나는 사이코패스의 목의 동맥을 터트렸을 때 뿜어져 나오는 피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이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은 결국 그 사이코패스를 죽여야 이 지긋지긋한 사이코패스 트라우마가 끝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는 교도소에서 나오지 못하고, 사이코패스를 죽여야 하니 여정은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동은의 복수를 도와 박연진의 엄마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교도소에 들어가서 사이코패스와 함께 비극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연대 중 가장 먼저 복수극에 동참한 현남 역시 딸을 유학 보내고 나서 남편의 죽음에 개입을 할지도 모른다. 동은의 계획에는 현남이 현남의 남편 죽음에 개입하지 않지만 현남은 그 노을을 봤을 때, 즉 사이코패스가 흰자위에 퍼지는 피가 마치 노을 같았다는 것처럼 남편의 죽음에 노을처럼 퍼지는 개입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극으로 끝맺을 할지도 모른다.
그다음 피해자 연대 어벤저스에 남은 인물은 경란이다. 동은이 박연진의 모습을 먼 거리에서 지켜봤다면 경란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본 인물이다. 경란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동은이가 자퇴를 하지 않았으면 내가 너 대신 학폭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애매하고 안개 같은 인물이 경란이라고 생각된다. 경란은 두 가지의 나팔꽃을 다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다.
손명오를 죽인 살인자는 처음의 예상대로 박연진일수도 있다. 이후 하도영(감독은 한국의 양조위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기원의 계단에서 도영이가 동은과 마주치는 장면은 그야말로 화양연화의 한 장이었다)의 행보도 궁금하고, 무엇보다 동은의 친모가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다.
이야기는 아주 촘촘하다. 모든 장면에 복선이 가득하다. 동은이 발령받아 들어간 초등학교 1학년 2반을 걸어갈 때 뒤로 보이는 아이들의 그림 역시 봉준호의 기생충에서의 그림처럼 온갖 은유가 잔뜩 있었다. 단지 복수극일줄 알았으나 스릴러를 넘어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은의 복수극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하다 보니’는 1도 없다. 이렇게 잘 만드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도 인기인데 주옥같은 쌍욕 퍼레이드를 어떻게 잘 표현되는지 모르겠네. 드라마 속 빌런들에게는 참 주옥같은 상황이지.
오늘의 선곡은 폴킴의 너는 기억한다 https://youtu.be/l5ZWEGJ7M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