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Mar 27. 2023

사랑과 영혼에서 크리스틴까지

영화를 보며 행복했던


드문드문 보다가 작정하고 오티티서비스로 각을 잡고 다시 본 영화 ‘사랑과 영혼’은 재미있었다. 영화 속 몰리는 참 예뻤다. 요즘 말로 존예다. 무엇보다 패트릭 스웨이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패트릭 스웨이지의, 패트릭 스웨이지만의 미소가 보는 이들까지 환하게 만들어버리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지금 보면 엉성하고 조잡한 그래픽이지만 영화는 그런 조잡한 그래픽이 엉성하게 보이지 않게 했다. 영화적 마법이 펼쳐졌다. 21세기에 나올 수 없는 영화이기에 21세기에 어울리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로 요즘에는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현실감이 강력한 이야기가 인기가 많다.


카지노에서 최무식의 그 현실적인 욕과 행동, 거칠지만 두려움이 가끔씩 드러나는 그런 현실적인 모습에서 사람들은 빠져든다. 실제 같은 이야기, 나르코스를 재미있게 봤다면 알 수 있듯이 예전처럼 영웅 서사에 기대어 마구 총질을 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외면을 한다. 더 글로리에서의 흡입력 강한 현실적인 서사, 미드 1883에서는 서부의 총질극이 아니라 하늘과 도둑과 질병과 강, 뱀, 추위 같은 현실적인 방해가 이민자들의 행렬을 방해한다. 그 서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오로지 상상력에 의지한 만달로리안의 서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다. 우리의 머릿속, 뇌의 세계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의 서사를 쫓기도 한다. 거기에 오래된 영화 ‘사랑과 영혼’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오직 사랑을 위해 나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녀를 위해 해결해 놓고 하늘로 가야만 했던 샘의 이야기.


사랑과 영혼에는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언체인드 멜로디가 나온다. 60년대의 노래인데 정말 좋다. 60년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정말 복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좋은 노래는 이미 6, 70년대에 다 나왔다.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 몇 번 움직임으로 음악을 드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연주되는 곳, 음악이 가득한 곳으로 뛰어가야만 들을 수 있었던 그 시대. 그렇기에 더더욱 음악이 주는 충만함에 대해서 잘 알았을 것이다. 우리가 공연장을 찾는 이유다.


언체인드 멜로디가 사랑과 영혼 속 몰리와 샘의 테마에 흐른다.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지만 이 음악이,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노래가 두 사람의 사랑을 엮어주고 있다. https://youtu.be/ol-0pq1UPn4

마광



사랑과 영혼에서 조금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83년도에 ‘크리스틴’라는 영화가 있다. 티타늄 인간이 자동차와 붕가붕가하여 자동차를 낳고, 아들이 딸이 되고 딸의 아기가 티타늄으로 되어 있어도 위로가 된다면 ‘경계’ 그런 것쯤 아무렇지 않았던 영화 ‘티탄’의 모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가 있다면 83년의 ‘크리스틴’ 일 것이다.


서사가 온통 어지럽고 철학적 논제의 ‘티탄’과는 달리 ‘크리스틴’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바로 존 카펜터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버린 미친 영화란 말이다. 광기 자체인 자동차 크리스틴이 인간들을 무참하게 쳐 죽이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 원작은 ‘살아있는 크리스티나’이며 존 카펜터가 영화적 입맛에 맞게 설정을 소설과는 좀 다르게 만들었다. 처참하게 부서진 자동차 크리스틴이 살아서 마구 움직이는 장면은 존 카펜터의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는 장면이다.  https://youtu.be/0Xq75RR7otQ

kyller durden


공포영화 마니아라면, 80년대를 2, 30대로 살아가는 공포영화 마니아라면, 80년대를 극장에서 공포영화를 보며 2, 30대 공포영화 마니아라면 존 카펜터 감독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들은 존 카펜터의 공포에 대해서 모여서 열띤 토론을 열었을 것이다.


카톡이나 인터넷이 없기에 오직 얼굴을 서로 맞대고 맥주를 들이켜며 존 카펜터가 만들어 놓은 공포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대화를 이어가고 토론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대로 밤이 깊으면 로맨스가 탄생했을 것이고 그들 중 부부가 된 이들은 지금 또 다른 영화산업에 몸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의 공포영화가 한으로 점철되어서 무서움을 강조하는 반면에 존 카펜터의 공포는 캐릭터가 가진 모순된 상황의 두려움, 실제로 있을 법한 호러블 한 존재들의 상처가 매주, 아니 매일 공포영화 마니아들을 모여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존 카펜터는 명실상부 B급 호러의 거장, 공포영화의 장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울한 시기였지만 80년대의 청춘들이 모여들어 존 카펜터의 영화토론을 하면 낭만이 하늘에서 쏟아졌고 오버스럽지만 상상을 표현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존 카펜터의 영화를 파고들고, 존 카펜터의 공포에 철학을 입히는 토론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존 카펜터는 쉣이지만 만세다. 40년 전 영화지만 존 카펜터 마니아들은 또 봐도 좋을 스티븐 킹 원작의 ‘크리스틴’이었다.


영화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의 주인공 야코는 존 카펜터 감독의 마니아다. 영화 속에서 그는 시종일관 존 카펜터의 영화를 자랑한다. 이 영화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영화 같은 실제 이야기.

다발 경화증으로 시력을 잃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야코는 그러나 밝다. 그에게는 시력을 잃기 이전에 본 수많은 영화적 상상이 있었고 꿈을 꾸면 그 상상력으로 실컷 달리기를 한다. 그리고 야코에게는 아이폰 4가 있다. 그 폰으로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랑하는 여인 시르파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야코는 시르파에게 자신은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는 챈들러가 가깝다고 이야기를 한다.


야코는 자신의 영화의 이야기를 시르파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제법 수준 높은 농담을 던지고 자주 웃는다. 야코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존 카펜터. 그의 영화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만 시르파는 타이타닉을 좋아한다. 아니 그런 영화를 좋아할 수가 있어? 야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영화 시디 중에서 타이타닉의 비닐은 뜯지도 않았다. 이 영화는 시르파와 함께 보리라.


시르파 역시 야코만큼 몸이 좋지 않다. 시르파는 혈액암을 앓고 있는데 어느 날 항암치료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덮치고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시르파는 야코와의 통화에서 울고 만다. 그때 야코는 시르파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차로 불과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시간. 하지만 휠체어와 폰이 없으면 움직일 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야코에게는 아주 먼 거리일 수밖에 없다. 야코의 위험천만한 여행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시르파에게 가기 위해.


영화는 암울할 것 같지만 야코의 밝은 성격 때문인지 즐겁게 흘러간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영화가 보기 힘든 건 기차역에서 만난 강도들 때문이다. 영화이긴 하지만 언젠가부터 시력장애에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의 돈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기가 힘들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감독인 테무 니키는 야코 역의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을 군대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후에 페트리가 연극과 영상을 오가는 배우가 됐지만 실제로 다발 경화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2013년에 시력을 잃었고 더 이상 배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감독에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이 영화 시르파와 같은 혈액암을 앓고 있었다.


감독은 연기를 하고 싶은 페트리에게 영화 제의를 했고 페트리가 수락함으로 해서 그의 연기에 대한 꿈도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가 탄생되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였다.



마지막 헤어질 때

사랑과 영혼의 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리는 크게 두 번 눈물을 흘린다. 동전이 공중 부유하여 손에 쥐어질 때 샘의 존재를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샘과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린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이야기. 이상하고 또 이상하고 그저 이상한 이야기. 하지만 사랑이란 그렇다. 답답하고 미칠 것 같다가 평온하고 빡치고 애타고 죽을 것처럼 보고 싶고, 설명할 수 없이 황당한 게 사랑이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뚜렷한 답도 없어서 갑갑하다.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사회에서 매장이 될지언정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트려 버린다. 당황스럽고 이상하고 미쳤고 말도 안 되는 것이 불같은 사랑이다. 사랑 그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


몰리는 사랑하는 샘에게서 정말 사랑받았다는 그 느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샘이 없는 이 험한 세상에서 아마도 다른 이들에 비해 잘 헤쳐가리라. 그런 몰리를 지켜주지 못해서 샘은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마지막 헤어질 때 몰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가 영화를 말해준다.


사랑해 몰리, 언제나 사랑했어.

동감이야,라고 몰리는 대답 한다.


죽고 나도 하늘에서 샘이 기다리고 있으니 살아가는데 열심히, 행복하게 삶에 매달리는 동기부여가 될 것만 같았다.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서 21세기에 어울리는 사랑과 영혼. 샘은 죽었고 몰리는 나이가 들었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남긴 명곡 ‘쉬 라이크 윈드’를 들으며 끝내자.


https://youtu.be/lU9p1WRfA9w

PatrickSwayzeVEVO


매거진의 이전글 설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