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고교시대
1978년에 나온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의 여주인공으로 장덕이 나온다. 장덕은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였다. 그리고 배우로도 활동을 했다.
우리들의 고교시대에서 김정훈은 소심하고 여성스러워 집안에서 걱정이 많다. 왜냐하면 그런 김정훈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운동도 잘하고 피아노를 전공하는 여고생 장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정 반대의 성격이지만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청순한 러브 스토리를 영화는 이야기한다. 김정훈은 바느질을 잘하고 오이팩을 하며 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뜨개질을 하다가 장덕의 얼굴이 떠올라 애가 타는 모습이 재미있다.
60년대 르네상스를 맞이했던 영화는 70년대 중반 이후 침제기에 접어든다. 집집마다 보급된 티브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주말의 명화 –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을 했기에 사람들은 굳이 극장으로 가지 않아도 가족과 단란하게 방에 누워 더빙판 주말의 명화를 보는 게 좋았다.
그래도 극장가에서 인기가 있었던 건 하이틴 청춘 영화였다. 꾸준하게 사람들이 좋아했다. 당시 하이틴 영화 속에는 지금 봐도 부러울 정도의 정원이 딸린 큰 집에 사는 부자와 부자인 그들이 소시민처럼 소박하고 친밀하게 그려지는 내용이 많다.
고교얄개의 이승현의 집도 그렇다. 이승현은 되바라지고 부자에 태권도 선수이며 누나가 무려 정윤희다. 정윤희는 정말 너무 예쁜 거 아님. 이승현은 누나인 정윤희의 얼굴에 연탄칠을 살짝 한다. 그것도 모르고 정윤희가 밖으로 뛰어 나갔다가 그 예쁜 얼굴에 연탄이 묻은 걸 알고 ㅋㅋㅋ 이승현은 모자라는 것 없고 사치에 못 사는 애들을 깔보며 살아갈 것 같은데 양로원을 찾아서 노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가난하게 누나와 단 둘이 사는 김정훈을 위해 신문배달도 한다. 검열이 가득했던 시기에 하이틴 영화 속에는 일반인들이 꿈꾸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었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래서 얄개시리즈가 많이 나왔다. 1편부터 있지만 내용이 이어지는 건 ‘고교얄개’ 뿐이다. 이후 얄개행진곡, 고교 명랑교실, 고교우량아, 소문난 고교생 등 엄청나게 얄개 시리즈가 쏟아졌다.
얄개 시리즈는 대부분 내용이 거기서 거긴데, 거기서 거기라 대부분 보면 재미있다. 주인공을 하는 배우가 대부분 이승현, 진유영 위주였는데 ‘우리들의 고교시대’에서는 김정훈과 장덕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우리들의 고교시대는 당시 하이틴 영화를 잘 만들어 내는 감독 세 명이 돌아가면서 옴니버스 식으로 제작한 3편 중 한 편이다. 장덕, 극 중 영아는 집안 때문에 한국을 떠나야 하고 김정훈, 태수는 보내기 싫어서 운다 엉엉. 영아는 태수를 놓고 외국으로 가야 하기에 일부러 못되게 군다. 하지만 태수와 함께 타기 위해 2인용 행글라이더를 제작하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같이 행글라이더를 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장덕이 대중에게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무대가 진미령의 데뷔곡 ‘소녀와 가로등’을 부르는 무대였다. 당시 제1회 MBC 서울가요제는 무대에 가수와 작곡가가 다를 때 같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규정이 있어서 장덕도 같이 무대에 오른다. 그때 장덕의 나이 17세. 빵모자 같은 모자를 쓰고 진미령이 부르는 노래 뒤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진미령과 장덕의 소녀와 가로등 https://youtu.be/HE_K-VbkIUI
그때 사람들은, 대중과 음악 전문가들은 도대체 저 소녀는 누구지? 누군데 저렇게 지휘를 잘하는 거야? 같은 반응이었다. 소녀와 가로등은 장덕의 곡으로 가사가 정말 애절한데 이는 장덕의 애틋한 경험으로 쓴 곡이라 그렇다.
장덕은 첼로 연주가 아버지와 서영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이혼을 하고 아빠와 지내면서 동양사상에 빠진 아버지와 음악 활동으로 바쁜 오빠를 기다리느라 늘 집에서 홀로 지냈다. 매일 밤 오빠와, 아버지가 언제 들어오나 가로등 밑에서 기다리며 떠올린 곡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장덕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전문 채널을 통해서 보기 바랍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뇌피셜이라 잘못된 정보가 될 수도 있음.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진미령이 노래를 끝내면 무대에 장덕도 올라와서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한다. 장덕은 일찍부터 음악을 했던 오빠 장현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장덕은 5학년 때 숙제를 하기 위해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음악에 빠져들었다. 장덕은 오빠인 장현과 함께 드레곤 렛츠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음악활동을 한다. 남매듀오로 미 8군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시의 포크송 분위기가 강했다. 쎄시봉 같은 느낌의 노래를 불렀다. 듣기 편안하고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의 느낌이었다. 그때 장덕이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있던 송창식이 가수를 준비하고 있던 진미령과 연결을 시켜주며 ‘소녀와 가로등’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장덕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히트를 친 소녀와 가로등 이외에 이미 15세에 작곡해 놓은 곡들이 서른 곡이나 있었다.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예술을 하는 가수가 탄생한 거니까 센세이션이었다. 직접 부른 노래도 인기가 엄청났지만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수들이 장덕의 곡을 받으려고 찾아왔다. 그 속에는 설운도, 주현미 등이 있었고 연기자인 오연수도 노래를 받으려고 찾아왔었다.
그러다가 이은하에게 한 곡을 주게 되는데, 이은하는 노래는 잘 부르지만 밤무대 가수 같은 뭔가 2류 가수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데 장덕에게 받은 그 한 곡 덕분에 이은하는 재즈와 발라드도 소화해 내는 훌륭한 가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 노래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었다.
장덕은 국제 가요제 이후 3년 연속 수상 속 작곡자가 되고, 마음의 행로의 출연을 계기로 연예계의 배우로도 데뷔를 하며, ‘현이와 덕이’로 음악 활동도 한다. 안양예고에 들어가면서 저 위의 영화처럼 하이틴 영화 10여 편이나 주연을 차지하게 된다.
승승장구만 할 것 같았던 장현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한다.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작곡공부를 하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결혼과 이혼, 고국에 대한 향수 때문에 어머니에게 말도 하지 않은 채 한국으로 도망치듯 다시 들어온다. 솔로로 노래를 발표하지만 대중은 냉담했다. 3년이라는 공백은 레코사와 조건에 맞는 전속계약은 어렵기만 했다.
재미있는 건 이 당시 김진아, 남궁원 주연의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감독을 맡아서 했다. 그러면서 야심 차게 ‘사랑하지 않을래’가 들어있는 정규 2집을 발표한다. 그러나 대중은 싸늘하기만 했다. 우울감으로 장덕은 방 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며 보냈다.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라 여기며 그렇게 우울하게 보냈다.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가 와도 장덕은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듣고 오빠인 장현이 상경하여 다시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을 한다. 7년 만이었다. 오빠를 만나 다시 한 번 남매듀오로 활동하면서 내놓은 노래가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였고 단숨에 가요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인기를 끌면서 장덕은 다시 정상으로 오른다. 그렇게 한국의 카펜터즈가 될 뻔 한 현이와 덕이는 오빠의 설암판정으로 멈추게 된다.
장덕은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난 후 모든 활동을 접고 병간호를 하면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각한 우울증이 시달리게 된다. 그러던 중 1990년 2월 4일에 잠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29년의 짧은 생을 장덕은 마감하게 된다. 당시에는 자살이라고 보도가 되었지만 수면제에 중독이 되어 깨어나지 못했다. 장덕은 당시에 감기약과 기관지 확장제, 수면제를 전부 섭취했었다.
장덕의 죽음 이후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노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대한민국을 울렸고 이 노래는 동료가수들이 추모앨범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8월 설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오빠인 장덕도 아내와 아들을 남겨 둔 채 동생인 장덕 곁으로 떠나고 만다. 그때 장현의 나이 고작 34살.
카펜터즈를 뛰어넘을 것 같았던 ‘현이와 덕이’의 비극적 죽음은 대중에게 너무나 크나큰 충격이었다.
장덕이 하늘로 간지 30년이 넘은 지금 장덕의 죽음을 안타깝게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옆 나라 일본은 자드의 이즈미 사카이가 죽고 난 후 꾸준히 그녀를 기리는 공연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장덕이 수면제 없이 잠도 들지 못하는 그저 한낱 비관적인 약한 예술가라고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17세의 나이에 당당하게 자신의 곡으로 노래를 부르는 진미령의 뒤에서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 했던 멋진 아티스트였다.
정수라가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는 소설로 다시 늘려도,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노래이며, 장덕에게 곡을 받기 위해 곡을 기다리던 조영남, 최진희, 변진섭, 김승진, 하춘화 등이 있었다.
대중이 즐겁게 그 예술가를 기억해 줄 때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면서.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https://youtu.be/wPkuhmixj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