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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05. 2023

44. 배송미

소설


 배송미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스쳐 지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워터 덕에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배송미는 일송 여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패티 보이드 같은 얼굴을 하고 마네킹 같은 몸매를 하고 있었고 자신의 학교에서 선생님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잘 나가는 아이였다. 배송미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각 학교에 퍼져 있어서 소문처럼 떠돌았는데,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고 가끔 모델 일을 하면서 받은 돈으로 워터 덕이나 클럽에서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여러 고등학교에서는 이미 연예인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아이였다. 우리와는, 나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학교를 나가지 않고 수업을 듣지 않아도 학교에서 건드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배송미의 큰 오빠가 지역에서 가장 큰 조직의 부두목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후배들에게는 무서운 언니였고 동기들에게는 늘 같이 있고 싶은 친구였고, 남학생들에게는 데이트 한 번 하고 싶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남자들 중에서는 대학생들도 많았다.           


 건너편에서 맞짱을 떠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배송미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배송미를 블랙박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게 너야,라는 황당한 말을 들은 것은 며칠 전이었다. 중앙 남고에 다니고 있던 내 어린 시절 같이 자란 윤민이라는 녀석이 집 앞으로 찾아와서 만났더니 덥석 그러는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윤민이는 배송미의 외모에 반했다. 비교적 일송 여고와 가까이 있는 중앙 남고 남학생들은 일송 여고의 배송미를 열광하다시피 했다. 선물이며 편지가 늘 교실 책상 위에는 수두룩 빽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송미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윤민이 녀석은 공책에다가 배송미의 이름만으로 공책 한 권을 다 써 버릴 정도로 머릿속에는 온통 배송미의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일송 여고 앞에서 배송미를 기다리고 있다가 선물을 전달했는데 차이고 말았다. 하지만 윤민이에게 그 충격이 그녀를 잊게 만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윤민이는 배송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밤늦게 전화를 해서 통화를 하는 것에 성공을 했다. 그. 리. 고.          


 윤민이 녀석은 나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외모를 말하고, 내가 사진부라는 것과 합기도 도장에 다닌 것부터 몰려다니는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매일 늦은 밤에 배송미와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김윤민이 아닌 내가 되어 배송미와 매일 밤 전화를 했으며 그러기를 두 달이 흘렀다. 배송미가 만나자고 한 것이다. 다운타운에 있는 블랙박스에서.         

 

 블랙박스는 각 학교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아이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교복을 입고는 출입이 안 되며, 입은 옷 또한 유행에서 조금 멀어지거나 머리도 평범하면 들어가지 못했다. 누군가 앞에서 넌 안 돼! 넌 아니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모습을 한 채로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한 채 청바지를 입고 배송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윤민에게 배송미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싫어하는 것, 어떤 잠옷을 입는지를 들었다. 윤민이는 내가 혹시나 잘못 말할까 봐 여러 가지를 일러주었다.     


 “근데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내 말에 윤민이는 “씨바 몰라,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 너도 한 번 만나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애니까 말이야.”      

    

 블랙박스는 창문이 없었다. 온통 어두웠고 아주 옅고 얕은 조명이 미미하게 비칠 뿐이었고 모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곳에 조금만 앉아있다가는 온몸에 담배냄새가 가득 배여 빨아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십 분 동안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와서 배송미에게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지나간 여자 후배 무리가 몇 번 지나갔고, 가죽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남자들이 와서 배송미에게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배송미는 반갑게 그들에게 인사를 받아주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앞에 놓인 주스를 마실 뿐이었다. 배송미는 눈 화장을 했고 속눈썹을 붙였다. 눈 밑의 화장이 진했고 입술 역시 진한 색이었다. 앞머리는 더듬이처럼 보였는데 스프레이로 고정이 되어 있어서 바람에도 망가지지 않을 것 같았고 머리에는 손수건으로 머리띠를 만들고 있었는데 산뜻하게 보였다.      

     

 티셔츠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는 아주 짧아서 허벅지가 다 드러났다. 무엇보다 어두운 곳에서 보는 배송미의 얼굴은 정말 인형 같았다. 작은 얼굴에 눈코 입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커피를 마셨고 배송미는 오렌지주스를 마셨는데 빨대를 사용하지 않아서 입을 댄 곳에 립스틱 자국이 선명했다.          

 “너 전화상의 목소리가 더 굵구나. 이렇게 만나니까 어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사실 윤민이가 일러준 배송미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았다. 너무 많은 말을 한꺼번에 들었다. 그걸 듣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 어쩐지 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주기 위해 나왔는데 나도 속물일까.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배송미와 나는 뭔가 어울릴만한 거리가 전혀 없었다.         

 

 “나도 합기도를 했거든. 넌 천지관이랬지. 난 신장동에 있는 도장에 다녔어. 검은 띠까지는 못 땄지만 재미있었어”라는 배송미의 말을 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순수했다. 소문처럼 강하고 욕설을 입에 달고 담배를 피운다는 말은 전혀 아니었다. 배송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아무도 배송미에게 와서 담배를 달라고 하지 않았고 배송미도 블랙바스의 탁한 공기를 싫어했다. 그녀는 웃을 때 얼굴에 빛이 났다.   


 “여기 별로지? 담배연기만 없으면 꽤 괜찮은 곳이야. 주스 한 잔에도 몇 시간씩 앉아있을 수 있고. 시끄럽게 수다를 떨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어. 어디를 가든 학생들은 늘 제재를 받으니까. 우리 오락실에 갈까?”     


 그래서 우리는 근처에 있는 화성 오락실에 갔다. 나는 헥사를 하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다. 벽돌 깨기도 그렇고 잘하는 오락이 있었는데 헥사를 했을 때 배송미는 옆에 앉아서 계속 감탄을 했다.    


 그리고 나는 사진에 관한 이야기와 친구들과 친구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야기, 특히 배송미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럼, 그 스캇? 스콧? 그 작가는 자신의 아내인 젤다를 본떠서 데이지를 만들었다는 거야? 너 이야기를 들으면 데이지는 정말 나쁜, 암튼 그렇네. 그런데 그런 여자를 개츠비는 잊지 못해서 5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와서 구애를 하고? 하지만 데이지는 그런 개츠비에게 또 상처를 주고?”     


 나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개츠비를 섞어가며 일대기와 개츠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배송미는 정말 눈이 반짝거리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너 어째서 그동안 전화상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어?”     


 “어 뭐 그냥. 만나면 해주려고 했지”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거짓말이란 한 번 하고 나면 제트기류를 타게 된다. 배송미와 오락실에 있는 동안에, 옆에 남자가 있음에도 남자들이 와서 배송미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늘 그런 일이 일상인 듯 배송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 탁구 하니?”     


 우리는 탁구장에도 갔다. “나 오빠들이 네 명이라 오빠들과 탁구장에 많이 갔었어”라는 배송미는 탁구를 잘 했다. 내가 생각하는 배송미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외모가 예쁜 그런 여학생이었다. 그리고 김밥을 먹으러 갔다. 다운타운에 있는 김밥 집에는 처음 갔는데 거기는 배송미가 자주 가는 곳인지 가자마자 이모들이 반갑게 배송미를 아는 체했다. 배송미 역시 그곳에 늘 앉는 지정석이 있는 나를 자신의 자리로 안내했다.           


 재잘재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윤민에게 들은 배송미의 이야기는 배송미의 입에서 듣는 배송미의 이야기와는 많이 달랐다. 잘 웃었고, 잘 먹었고, 잘 놀라고 호기심도 많았다.     


 “여기는 김밥에 들어가는 밥에 밑간을 먼저 해. 그래서 김밥 안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지 않아도 오래 씹고 있으면 아주 맛있어. 너 사진 잘 찍는다며?”     


 “잘 찍지는 못하고……”   

 

 “나중에 나 사진 좀 찍어줘. 예쁘게 사진을 찍고 싶어. 사진관에서 찍는 사진 말고 야외에서 하늘하늘 원피스 입고 이렇게 예쁘게 말이야.” 배송미는 입 안에 김밥이 다 보이는데도 크게 웃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녀를 그 이후에 다시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을 했을 것이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화상의 나와 눈앞에 있는 내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하루 동안 슈바빙에도 가지 않고, 올 댓 재즈에도 가지 않고 기철이나 아이들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 그대로 일탈을 했다. 일탈 속에는 일상에서 느껴볼 수 없었던 흥분이 있었다. 일탈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일탈 속에는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편안함이 배제되어 있었다. 일탈도 일상이 되면 그것이 행복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좋은 옷을 입어도 단지 그때뿐, 좋은 옷도 일상이 되어 버리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배송미 역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을 것이다. 늘 만나는 친구들과 늘 하는 말투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일탈을 즐겼을 것이다.      

    

 문득 삶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이 떠올랐다.




위대한 개츠비 ost - 라나 델레이의  Young and Beautiful https://youtu.be/_xZC_eoGJ8g?si=VuQJI1sNgrGxQe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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