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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28. 2023

43. 블랙리스트

소설



 냉장고에서 생활한 지 두 달이 되어 갔을 때 냉장고의 냉각기가 멈춰 버렸다. 냉각기의 바람이 멈추니 냉장고 안은 그야말로 malodor로 가득했다. 안 되겠다 싶어 법원으로 가서 정식으로 Malodor Prevention Act를 통과시켜 줄 것을 건의하려고 냉장고를 나왔다. 법원으로 가서 냉장고 안의 쾌적한 삶을 파괴하는 아세트 알데히드, 황화수소, 메틸베르캅탄과 트리메탈아님을 malodor 물질로 지정해 줄 것을 요구하려 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냉장고 문을 열고나오니 두 달 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냉장고 안보다 밖이 더 서늘하고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추위였다. 곧 이가 부딪혀 달그락 소리를 냈다. 거실은 온통 서리가 껴 있었고 새하얀 눈꽃이 피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자기네 나라에 갔던 얼음 사나이가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도 혼자였다.


 “라면을 만들 텐데, 자네도 먹을 텐가?”라고 얼음 사나이가 말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새하얀 눈꽃들이 거실에 가득 들어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것인지 추워서 고개가 자연적으로 떨렸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자네가 오니 거실에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군”라고 나는 말했다. 얼음 사나이는 아무런 말없이 내 앞에 라면을 내왔다. 라면은 얼음이 동동 떠 있었고 얼음물에 얼음으로 만든 라면이었다. 나는 덜덜 떨며 얼음 라면을 먹었고 얼음 사나이는 배가 고팠는지 단숨에 라면 그릇을 비웠다. 나는 먹다 남은 얼음 라면을 얼음 사나이에게 부어 주었다. 얼음 사나이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짓고 라면을 마저 먹었다. 라면을 씹어 먹는데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와 헤어졌네. 이제 더 이상 아내는 얼음 나라에서 살 수 없나 봐”라며 얼음 사나이는 허연 숨을 토해냈다. “실은 말이네. 원인은 우리에게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네. 아내는 아이를 무척 갖고 싶어 했지. 아무도 없는 얼음 나라에 따라간 것도 나를 닮은 아이가 생기면 예쁘게 키우기 위해서였지만.” 까지만 말을 하고 얼음 사나이는 말을 끊었다. 머릿속에서 malodor는 싹 사라졌다. 코밑에도 이미 눈꽃이 새하얗게 피어올랐다.     


 #

 기철, 나 그리고 득재는 상담실에 불려 가서 터미네이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내가 쓴 글을 문예부에서 교지에 기철이와 득재가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이 문제가 되어서 터미네이터 앞에 불려 왔다.


 나는 이런 초현실 이야기를 여러 편 적어놨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편지로 가끔씩 보내기도 했다. 이 짤막한 소설, 얼음 사나이의 이야기는 하루키의 단편, 얼음 사나이의 이야기가 좋아서 그 뒤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몇 편 적어 놓았다. 하루키의 단편은 얼음 사나이와 결혼을 한 아내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나는 얼음 사나이의 입장에서 글을 써 본 것이다.    

  

 그런데 교지가 돌고 돌아 터미네이터에게 들어갔을 때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냉장고가 학교를 말하는 것이고 황화수소라든가 아세토 알데히드 같은 물질이 수학을 비롯해서 역사 선생님을 지칭한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나는 사실 그렇게 머리가 좋지 못해 빙빙 돌려서 글을 적지 못한다. 그럼에도 터미네이터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터미네이터는 기철이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지에 싣도록 총괄 책임지는 문예부부장인 기철이와 득재를 더 야단을 쳤다. 터미네이터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가 있는데요?”


 “뭐? 뭐라카노, 하루 뭐? 이 자식들이.”


 터미네이터에게 하루키 같은 소설가를 말하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이전에 실린 얼음 사나이의 후속 이야기로 오래되었지만 득재가 가서 교지를 찾아와서 터미네이터에게 설명을 했다. 이것 봐라, 이 이야기 다음의 글이 이번에 실린 글이다, 식으로 득재가 터미네이터를 설득했지만 들릴 리가 없었다.


 “엎드려.” 이 한 마디에 우리는 터미네이터에게 엉덩이를 내주고 상담실을 나왔다. 점심시간을 몽땅 상담실에서 보냈다.


 그날 점심시간은 효상이 여상 밴드부에 초대받아서 밴드부 연습실에서 기타 연주를 도와주는 날로 우리도 같이 가기로 했다. 여상 밴드부 보컬이 셀러브리티 스킨을 부르고 효상이 반주를 해주는 날이었다. 여상 밴드부의 보컬은 입술이 뒤집어진 것이 꼭 커트니 러브를 닮았다. 우리는 그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터미네이터는 그런 우리의 계획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Hole - Celebrity Skin https://youtu.be/O3dWBLoU--E?si=9s4KOTWD5GedaTBN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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