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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26. 2020

코로나와 피아노 맨

일상 에세이


고요한 장례식장. 적막이 장례식장을 흐르고 있고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가족들도 마스크를 한 채 가만히 앉아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사태는 모든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자연은 늘 그렇듯이 햇살을 받고 온도를 높이며 봄의 풍경을 기다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풍경은 질타와 분노 그리고 공포와 겁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종합병원에 딸린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열을 재고 손 소독을 하고 해외 이력을 말한 다음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개개인 깊이까지 들어와 버린 무형의 사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들의 모습이 평소와 다른 또 하나는 권태가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어깨 위에 단단하게 박힌 권태 때문에 늘 힘들어했지만 권태가 빠져나간 지금은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의 장례식장은 울고불고 난리 속에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지 않고 장례식장 근처 어딘가에 주차해놓은 자동차를 빼 달라는 방송과 술이 되어서 소리를 지르고 눈물과 웃음이 한데 어우러진, 슬픈데 웃을 수밖에 없는 진풍경이 있지만 이 사태는 그 모든 것을 종식시켰다.


적막과 고요가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틈을 벌리는 것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정도뿐이다. 오는 사람도 없고 오는 사람도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벽의 액자처럼 장례식장의 적막 속 한 부분이 되어 있다.


먼 길을 오면서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들었다. 피아노맨이 오늘 이전에 들었던 것만큼 들리지 않는 것도 이 사태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사태는 피아노맨의 매력을 뽑아가 버렸다. 빌리 조엘의 터치와 하모니카의 환상적인 콜라보를 훔쳐갔다.


이 사태는 작년의 추억처럼 금방 지나갈 것이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여러 번 사랑하는 것이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그때의 그 사람을 찾고 싶은 것일까, 그때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사태가 금방 진정이 되어도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은 지금 이전처럼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듣는 피아노맨은 지금 이대로도 피아노맨이기에 지금의 피아노맨이 예전의 느낌이 나지 않더라도 좋아해 주리라. 그러니 사태가 바람처럼 지나가길, 모두가 힘을 내길 바라며.


#


여기까지가 2월 하순에 있었던 장례식장에서 쓴 글이다. 장례식장에 오는 문상객을 전부 오지 말라 막고 그렇게 보내면서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계속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정도 흐른 지금 한국의 코로나 사태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 두 달 동안에도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종종 들었다. 피아노맨은 코로나가 오기 이전의 느낌은 아니지만 코로나 때 들었던 느낌 또한 아니다.


오늘의 날은 1940년대의 에든버러의 날씨처럼 흐리기만 하다. 빌리 조엘은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친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피아노를 잘 쳤다. 그도 그럴 것이 빌리 조엘의 아버지가 클래식 연주자였다. 해서 아버지는 아들이 클래식 연주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청소년의 빌리 조엘은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권투에 재능을 보였다.


빌리 조엘은 유소년 아마추어 권투 선수권 대회에서 22번인가? 많은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하지만 한 경기에서 상대방에게 펀치를 잘못 맞아 코뼈가 그대로 내려앉게 된다. 권투를 쉬고 있는데 당시 유명한 쇼 ‘에드 설리반 쇼’에 비틀스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빌리 조엘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한다.


빌리 조엘은 그전까지 록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서 가수는 그저 수동적으로 부르는 입장이었는데, 자기가 음악을 만들고 그 만든 음악을 자기네들이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때 빌리 조엘은 17살이었다. 비틀스가 미국 상륙 당시 그때에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부르는 록스타일의 노래였다. 소녀 팬들이 새떼처럼 달려들었고 그 여파는 거대한 로큰롤의 고장 미국을 강타했다. 그런 천방지축이었던 비틀스의 음악에 철학적으로 성찰을 일깨워준 가수가 밥 딜런이었다.


비틀스는, 특히 존 레넌은 밥 딜런의 가사가 표현하는 깊이와 세상을 관통하는 눈에 반하게 된다. 존 레넌은 당시 밥 딜런과 같은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비틀스의 노래, 미셀, 걸, 인 마이 라이프 같은 노래는 밥 딜런의 포크음악의 영향을 받은 곡이다.


어떻든 빌리 조엘은 비틀스를 보고 대번에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얼굴만 비치고 나와서 클럽에서 피아노를 폈다. 그때 빌리 조엘은 자신이 리더로 밴드를 만든다.


빌리 조엘은 밴드를 만들자마자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이 무너지는 현실에 고개를 숙였다. 어린 친구들끼리 만들어진 밴드는 금방 해체를 한다. 그때 빌리 조엘은 실의에 빠져서 내가 음악을 해야 하나, 굳이 이런 것을, 하며 자책한다.


71년에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빌리 조엘의 모습을 보고 음악 관계자에 발탁되어 ‘쉬즈 가더 웨이’라는 노래로 앨범을 낸다. 하지만 바로 참패. 이 노래가 빌리 조엘의 데뷔곡이지만 그 곡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빌리 조엘은 빌 마티니라는 가명으로 피아노 연주를 클럽에서 하며 그곳에서 웨이트리스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때, 클럽의 분위기를 그대로 노래에 옮긴 곡이 ‘피아노 맨‘이다.


피아노 맨은 그해 빌보드 25위까지 올라간다. 대수롭지 않은 순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워낙 거대한 나라가 미국이고 엄청난 노래가 판을 치는 곳에서 25위는 대단한 것임에 분명하다. 당시에 메가 히트는 아니지만 피아노맨은 빌리 조엘이라는 이름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피아노맨 이후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빌리 조엘은 기복이 심했다. 2집의 피아노맨으로 조금 늦게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다. 4집은 100위 밖으로 밀려났고 하락세를 보인다. 하지만 빌리 조엘이 아닌가.


5집의 ‘저스트 웨이 유아’ 이 노래로 다시 상승세를 타면서 6집의 ‘어니스티’로 드디어 빌리 조엘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전 세계에 각인시킨다. 빌리 조엘의 많은 곡이 사랑스럽고 좋지만 피아노 맨은 각별하게 많이 듣게 된다.



피아노 맨은 술집에서 매일 보는 친구들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봐, 친구들에게 대해서 이야기해 줄게. 라며 말을 하는 것 같다.


술집의 존은 내 친구라네
네게 술을 사 주곤 하지
농담도 잘하고 재빨리 담뱃불도 붙여줄 눈치도 있는 친구지만
항상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해, 빌 죽을 것 같아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채
정말, 톱스타라도 될 수 있을 걸
이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또 여기 폴은 부동산 중개업자라네
바빠서 결혼할 틈조차 없었지
그래서 여전히 해군에 있는 데이빗이랑 얘기하는 게 소일거리인데
아마 평생 저럴 테지


라며 술집에서 매일 만나는 일상을 노래한다. 마치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한 일생이 가장 좋은 것이라 피아노 맨은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픈 일상이 실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일탈일지도 모른다.


피아노 맨을 듣고 있으면 그냥 피아노 맨에 빠져든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그저 몸을 좌우로 흔들며 피아노 맨을 들을 뿐이다. 노래에 온전히 빠지게 된다.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은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피아노 맨을 듣는다. 하루에 한 번은 듣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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