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뷰가 좋은 카페에 간다. 카페에 앉아서 바다 뷰, 도심지 뷰, 또는 논 뷰 등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카페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카페는 골목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로 창문으로 오래되고 단단한 골목의 벽이 보인다. 나는 벽 뷰를 좋아한다. 앞이 딱 막힌 벽을 보는 게 좋다. 벽은 마치 나에게, 푸른 하늘이 보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아직 계절의 추위가 사람들의 옷깃에 매달려 카페로 딸려 들어온다. 그 느낌을 받으며 벽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벽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페에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는다. 제목이 벽 속의 다른 벽이다. 벽을 깨고 싶어 하는 벽의 이야기다. 초현실이며, 극사실주의에다가 온통 은유로 가득한 모호한 책이다. 모더니즘을 깨는 이야기다. 해체에 가깝다.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렵다. 인간도 단단한 벽을 두르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벽이 더 완고해진다. 그러다 보면 도저히 깰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카페에 앉아서 벽을 보는 건 좋다. 골목의 벽은 봄이 되면 벽과 벽 사이에서 생명의 태동을 볼 수 있다. 녹색의 그것들이 고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벽을 보는 재미가 최고조에 이른다.
오늘 14개월 동안 끊었던 찌개와 마요네즈를 듬뿍 먹었습니다.
반찌개세력의 밥상 장악,
브로콜리의 식당장악 시도,
채소폭거 등 세계에서 콜레스테롤을 몰아내려는
파쇼행위에 대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대국민 호소에,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어릴 때 오락실에 가면 엄마한테 늘 혼났다. 혼나는데도 학교가 끝나면 쪼르르 달려 오락실에 가서 좋아하는 오락기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오락은 내가 져야 끝나는 게임이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엄마는 이기지도 못하는 오락 왜 맨날 가냐고 혼을 냈다. 져야만 끝나는 오락을 왜 그렇게 악착같이 했을까. 생각해 보면 이길 수 없는 오락이지만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긴 회차를 견뎠다. 비록 얼마 안 되는 간극이지만 그 틈을 여봐란듯이 벌려놨다. 거기에서 오는 쾌감이 컸다. 비록 질지라도, 그리하여 내가 등을 보이고 나올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덜 질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인생도 오락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은 삶에 진다. 질 수밖에 없다. 죽기 때문에. 인간은 삶에 진다는 뻔한 사실을 알지만 오늘도 악착같이 매달린다. 왜냐, 어제보다 좀 더 긴 회차를 견디기 때문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긴 회차를 견뎌 오락이 끝나면 3위 안에 내 이름을 새길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코끝에서 찰랑거리는 욕조의 뜨거운 물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지만 좋은 기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많이 났다. 으쌰 하며 탕에 들어가 애써 좋은 기억을 떠올려도 자주 썩 좋지 못한 기억이 밀고 들어왔다. 세상을 낙관하지는 않지만, 비관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늘 탕 속에서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피 냄새가 가득한 곳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미간을 좁히는데 조금만 지나면 안정이 된다. 피 냄새는 자주 맡을 수 없지만 가끔 피 냄새가 진동하면 그 냄새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건 설명하려고 애쓸수록 형태가 일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