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설
요즘 울릉도 식당 인심에 관해서 안 좋은 소식이 유튜브로 나오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전부터 나왔지만, 근래에 들어 일반 영상에 그 사실이 들통나고 있다. 동해나 여수 등의 일부 식당에서도 손님에 대한 안 좋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울릉도의 한 식당과 모텔에서도 그런 영상이 촬영되었다. 주인공에게는 울릉도에 대한 안 좋은 인식만 남게 되었다. 나 역시 울릉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요즘의 떠오르는 소식과는 거리가 먼 안 좋은 기억이다. 울릉도에 한 번 갔다 왔다. 그리고 다시는 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울릉도에 갈 때에는 포항에서 페리호를 타고 몇 시간이나 가야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의 짝지가 울릉도에서 온 녀석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고, 종종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어머니는 성이 같아서 더욱 친밀하게 대했고, 멀리서 혼자 와서 공부를 하는 짝지에게 먹을 것이나 김치 등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1년을 붙어 다니면서 너무 놀다 보니, 2학년에 올라가서는 반이 붙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신청하는 과목이 달랐는데, 2학년에도 같은 반이 되었고, 3학년에도 같은 반이었다. 결국 3년 내내 짝지였다. 물론 다른 아이와 자리를 바꾼 적도 있었지만 내내 붙어있게 되었다. 녀석은 문예부 부원으로 글을 잘 썼다. 게다가 술도 잘 마셨고, 글을 잘 써서 여고의 아이들에게도 인기도 많고, 당구도 300이나 쳤고, 싸움도 잘하고, 깡도 있었다. 3년 내내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녀석의 하숙방에 모여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며 놀고 있으면 시간이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무시무시한 학주에게 머리가 길다고 지적을 받았지만 전혀 깎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걸려 머리가 깎이면 근처 이발소에 가서 빡빡 밀어서 반항을 했다. 그땐 그 모습이 멋있었다. 반항이란 청춘의 특혜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학교의 규정이나 학칙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교지에 글로 표현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뭔가 녀석의 틈이 벌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틈으로 녀석의 본모습이 자신도 원치 않게 흘러나왔다고 해야 할까. 당구가 300인데 당구를 치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없었다. 당구 이야기를 하면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했다. 우리는 당시 80 정도 놓고 당구를 쳤기 때문에 한창 당구의 재미에 빠져 있었다. 녀석을 당구장에 데리고 가면 꼭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빠졌다. 어느 날은 얼굴에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채 학교에 왔는데, 옆의 학교와 우리 학교 일진들이 패싸움을 하는데 거기에 껴서 같이 싸움을 한 것이다.
주먹은 터져 있고, 얼굴은 엉망이라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지만 녀석의 운동신경은 너무나 둔했다.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면 공을 차는 포즈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공이 앞으로 굴러와도 발로 잡지 못했고,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우리 중 가장 느렸고, 탁구는 아예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합기도 체육관에 다닐 때에도 폼이 엉성해서 누구와 대련을 해도 얻어맞는 타입이었다. 분명 건들건들 말하는 타입에 깡도 있고 겁은 없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타입이었다.
한 번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나의 외가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외가는 아주 시골이고 계곡이 흐르는 곳에 있었다. 여름이면 괜찮지만 겨울은 그야말로 혹독하다. 우리는 겨울방학에 갔다. 녀석은 울릉도 출신이라 헤엄을 잘 쳤다. 소풍에 가끔 도시 근교의 호수에 갔을 때 혼자서 저 먼 곳까지 헤엄으로 갔다 올 정도로 끝내주었다. 외가에 갔을 때 계곡에 들어가면 안 되었지만 녀석은 그 추운데 들어갔다가 외가에 있는 내내 감기에 걸려 녀석 몸 돌보느라 우리는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소풍 때처럼 헤엄을 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말렸지만, 옷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허벅지까지 들어갔다가 너무 추워서 나왔는데 그만 감기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3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 우리가 알던 녀석의 모습이 조금씩 벗겨졌다. 싸움을 잘한다고 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합기도 체육관에서 대련은 엉망이었고, 아이들과 팔씨름을 해도 누구에게도 이기지 못했다.
물론 합기도와 싸움은 다르지만 그 기본기라는 것에서 이 녀석은 운동신경이 너무 없다고 사범님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우리에게 딱히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와는 또 잘 지냈다. 술을 좋아했던 녀석은 술을 마시면 감정에 충실해졌다. 지나고 나서 보니 술도 약한데 친구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우리가 한 잔 마실 때, 몇 잔을 마셨다. 그리고 빨리 취했다. 독한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내보였다.
술은 항상 우리보다 빨리 취했고, 목소리가 높아졌고, 허세가 입 밖으로 계속 나왔다. 3년 내내 울릉도에 한 번 가자고 했지만, 결국 녀석의 어떤 점 때문에 우리는 울릉도에 가지 못했다. 항상 이야기를 하면 배 값만 마련되면 울릉도에 와라, 오면 숙소와 식사를 해결해 준다는 말을 3년 내내 들었다. 방학에 가려고 하면 핑계가 늘었다.
2학년 때부터는 방학에도 녀석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렇게 졸업을 했고 녀석은 집이 있는 울릉도에 갔다. 졸업한 그 해 여름에 우리는 울릉도에 가게 되었다. 가는 동안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멀미 때문에 죽을 것 같았고,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한 시간 전에도, 두 시간 전에도 봤던,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도동항은 깨끗하고 맑고 좋았다.
내리자마자 녀석을 우리를 반기며 숙소는 마련해 놨으니 여기(도동항 포구)에서 오징어 회와 튀김을 먹자고 했다. 그때는 포구에서 바로 잡은 오징어로 튀김이나 회를 해 주었다. 맛이 정말 좋았다. 소주와 함께 먹으니 몸은 이미 알코올에 잠식되었다. 그렇게 앉아서 새벽까지 소주와 오징어 회, 깨끗한 오징어 튀김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포구의 바닷속 바닥이 보이는 맑은 울릉도의 바닷물과 맑은 공기에 취하고 소주에 취했다. 다음 날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우리는 세 명이 갔다. 녀석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이었다. 녀석과 함께 네 명이 고등학교 때 거의 붙어 다녔다. 녀석은 우리를 한 식당으로 이끌더니 전복죽을 먹였다. 그러나 그 돈은 우리가 지불했다.
먹고 녀석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녀석은 극구 사양했다. 막내였던 녀석은 위로 결혼한 누나 형들이 있고, 부모님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낚시 배 이야기를 하니, 녀석은 낚시를 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낚시 배를 타는 건 아니고, 버스를 타고 저동 쪽으로 가서 낚시를 했다.
우리를 거기에 내려 준 다음 녀석은 볼일을 보러 갔고, 우리 세 명은 낚시를 했다. 낚시의 미끼는 오징어 똥창. 처음에는 손에 묻히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했지만, 전혀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고기가 잡히고 나니 옷이고 머리고, 오징어 똥창이 묻어서 냄새가 지독했다. 반나절을 낚시를 하며 헤엄을 치고 놀다가 저녁에 버스를 타고 오는데 기사 아저씨가 우리의 몰골을 보고 자꾸 웃었다. 우리 주위에는 누구도 오지 않으려고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