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설
우리는 씻고 어제의 그 자리에서 또 소주와 오징어 튀김을 먹었다. 녀석도 앉아서 같이 마시면서 놀다가 녀석의 후배가 울릉도에 왔다며 합석을 했다. 후배는 녀석처럼 울릉도 출신인데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후배는 친구 한 명과 그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녀석의 후배와, 후배 친구의 풍채가 대단했다. 배는 나왔는데 그만큼 어깨와 팔뚝도 굵었다. 근육돼지 같은 분위기였고, 머리는 스포츠형에 인상이 험상궂었는데, 알고 보니 대구에서 조직 생활에 몸담고 있었다.
아직 똘마니이긴 했지만 말투나 인상, 행동은 이미 중간급 조직의 포스였다. 우리는 다 같이 앉아서 울릉도 밤바다의 정취에 녹아들었다. 술맛, 오징어 튀김 맛이 점점 좋아졌다. 관광객들은 전부 포구에 앉아서 소주와 오징어 요리를 먹었다. 시끌벅적하면서 자연주의적인 모습이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정에 가까워졌다. 우리는 전부 술이 많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녀석의 후배와 후배 친구는 우리에게까지 형님, 형님 하며 극존칭을 썼다. 그런 말투가 부담스러웠지만, 술도 취해서 그런지 오냐 하게 되었다. 그때 녀석이 후배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녀석과 후배는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누가 봐도 녀석이 후배에게 상대가 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그런지 녀석은 후배에게 계속 욕을 했다. 후배 역시 녀석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칫 누군가 맞아서 곤죽이 될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우리 쪽이 그렇게 될까 싶었다. 녀석과 후배는 멱살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뜯어말렸다. 그러는 가운데 녀석과 후배가 옥신각신하다가 후배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얼굴을 그대로 땅바닥에 박았다. 그때 이가 부러졌다. 술이 취했는데도 그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흘렀고 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후배는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분노로 인해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우리를 보며 다 죽인다고 덤벼들었는데, 후배의 친구와 친구의 여자 친구가 말렸다. 내가 그 후배를 좀 말리려고 하니, 후배의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서 조용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라고 했다. 우리는 녀석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사라졌다. 도망을 간 것이다. 우리만 남겨두고, 일은 전부 저질러 놓고 사라진 것이다. 항상 그렇다. 나타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우리들에게 스며들어 어물쩍 넘어갔다.
녀석은 우리 말고도 학교에서 어울리는 아이들이 여러 파가 있었다. 문얘부와도 어울렸고, 하숙을 했기에 하숙을 같이 하는 아이들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어쩌다가 일진 애들과도 어울렸고, 우리와도 어울렸다. 아마 우리와 계속 어울렸던 이유는 내가 1학년 때부터 짝지이기도 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녀석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온전하게 받아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만 녀석을 친구로 생각하고 대했다. 우리 세 명은 무릎을 꿇었다. 후배는 우리에게 폭행을 가하려는데 후배의 친구가 술이 좀 깼는지 우리에겐 잘못이 없다며 폭행을 했다가는 큰일이 날지 모른다며 말렸고, 녀석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후배는 거의 울부짖으며 녀석을 찾으러 갔다. 가면서 우리에게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들이 사라지자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창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후배가 녀석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게 창문 틈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우리 세 명 중에 한 명은 영혼이 가출한 것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그 후배는 소리를 지르며 새벽 내내 녀석을 찾아다녔다. 그 후배는 소리를 지르며 새벽 내내 녀석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조마조마했다. 만약 후배가 우리를 찾아서 숙소 문을 쾅하고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우리는 밤새 잠도 못하고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해가 밝아오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겨우 한숨 돌렸다. 녀석이 지금까지 했던 말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울릉도에 오면 다 대접하고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겠다던 말 역시 허풍이었다. 후배는 다행히 우리 숙소를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아침이 밝자마자 배를 타려고 했지만 배 값이 없었다. 우리는 경비를 다 털어서 숙소 값을 지불하고, 이틀 동안 먹은 술과 오징어 요리 값을 지불하고, 교통비와 음식의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우리는 항구 앞에서 안절부절이었다. 그 후배가 나타나기 전에 배를 타야 하는데 녀석은 아침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소식을 들었는지 녀석의 동네 친구가 항구 쪽으로 왔다. 그 친구가 우리 배 값을 지불해 줬다. 녀석의 친구는 녀석과 울릉도에서 나고 자란 한 동네 친구로 포항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2학년 때인가, 녀석에게 놀러 왔을 때 우리가 그 친구를 대접했다. 같이 당구도 치고, 치킨에 맥주도 마시고, 클럽 활동하는 친구들도 만나게 해 주었다.
심지어 지 친구가 왔는데 녀석은 다른 일 때문에 친구를 우리가 며칠 돌봐줬다. 잠은 녀석의 하숙방에서 잤지만, 하루 종일 우리와 함께 다녔다. 그 친구가 미안하다며 우리의 배 값을 지불했다.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하고 배를 탔고, 그 길로 포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포항에서 친구들은 바로 집으로 갔지만, 나는 포항을 거쳐 울진으로 올라, 태백까지 갔다. 그렇게 일주일 배낭여행을 했다.
그때 벽돌 공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돈을 바아서 버스를 타고 7번 국도로 오르고 올라 태백을 거쳐 강릉, 양양, 속초까지 갔다. 거기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속초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는 정말 재미있었다. 아주 작은 마을의 정류장에 전부 들렀다가 고가도로를 넘어서 구불구불한 산맥을 넘어 서울로 갔다. 시간이 몹시 오래 걸렸지만 풍경을 보는 재미가 좋았다.
서울에서 백남준 전시를 보고, 과천에서 경마장 구경을 하고 옆에 있는 미술관과 동물원까지 구경하면서 며칠 서울의 친척집에서 보내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녀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후배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배가 대구에서 죽었는데, 원인 중에 넘어져서 이가 부러진 것 또한 포함이라고 했다. 그 후배의 죽음에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온전하게 녀석일 뿐이다.
녀석은 우리에게 그 현장에 같이 있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같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일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시끄러운 해결을 원하지 않아서 결국 각자 몇십 만원씩 내서 녀석에게 보내줬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 뒤로 녀석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녀석의 후배가 죽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대구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우리가 왜 녀석의 변호사 비용까지 지불해야 했는지 답답했지만,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로 울릉도는 나에게 끔찍한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어선 말고 낚싯배도 있어서 타고 나가서 낚시도 하고, 독도도 구경시켜 준다는 말에 혹했던 우리를 반성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녀석을 불러서 밥 먹이고 재워주고 한 어머니도 휙 지나가고, 우리들이 너무 순진한 것에 대해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우리의 배값을 지불해 줬던 녀석의 친구도 그런 점을 우려했고 걱정이 많았다. 그게 무려 20년도 더 된 일이다. 한 인간의 알 수 없는 그런 점은 바뀔 수 있을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