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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날의 멸망 15

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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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호이어 카레라라고 하는 시계야. 꽤 좋은 시계지. 좋은 시계는 좋은 자동차와 좋은 스피커 그리고 좋은 사람과 마찬가지야. 좋은 시계 하나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좋아. 시간이란 정말 중요하니까 말이지. 시간은 순수해. 순수한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관념이지.” 오너가 오래 전의 마동에게 선물로 준 시계다.


입사하고 훈련과 거듭하면서 과연 내가 이곳에 적응이 가능할까? 그런 시기가 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함이 들었을 때였다. 뇌파를 채집하는 훈련을 다른 이들에 비해서 오너는 마동에게 집중적으로 트레이닝시켰다. 어떤 날은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까지 훈련만 했다. 생각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 훈련을 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출근해서 바로 집중력 트레이닝으로 시작해서 점심시간이 되면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밥을 먹고 저녁까지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훈련을 거듭했다.


초기에 다른 업무는 없었다. 교육과 훈련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마동의 옆에는 오너가 차트를 넘겨가며 마동의 상태를 체크했다. 생각주위에 꽤 많은 다른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집중의 강도가 올라갈수록 마동은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3달 동안 뇌파채취의 훈련에만 돌입했다. 역시 하루 종일 그 작업을 훈련하는 것이다. 지칠 만도 했지만 마동은 잘 견뎠다. 업무라고는 전혀 없었고 운동부학생처럼 오로지 하나의 훈련에 집중하여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훈련에 임하는 마동도, 마동을 지켜보는 오너도 꾸준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할당 치를 채워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첫 고객의 뇌파채취에 마동이 투입되었다. 약간의 흥분과 거대한 긴장을 안고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을 한 곳으로 그러모으고 개더룸에서 첫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동은 첫 작업을 무리 없이 마무리했다. 그 고객이 회사에게 큰 수익을 가져다준 중요한 손님이었는데 오너는 마동에게 맡겼다. 마동을 믿고 투입시킨 것이다. 오너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에 오너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첫 뇌파채취의 성공기념으로 오너가 마동에게 선물한 손목시계였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오전 10: 30분이었다. 마동은 벌떡 일어나 앉으려 했다. 그렇지만 몸은 마동의 생각과는 다르게 반응했다.


아아, 이런 세상에.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잠들어 버릴 수 있다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렇지만 정신은 생각처럼 쉽게 반짝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마동은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회식이 늦어져 귀가 시간도 늦어지고 잠드는 시간이 늦어졌어도 일어나는 패턴은 언제나 일정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도 마동은 일찍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보냈다. 마동에게 있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지독한 여름감기다.


마동은 천근 같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앉았다. 최원해의 목소리에 대꾸를 하는 마동의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잠. 겼. 다. 최원해는 마동의 목소리를 듣고 감기증상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괜찮으냐고 물었다.


당신 같으면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도 괜찮다고 할까.


마동의 목소리는 사람이 평소에 낼 수 없는 소리였다. 기괴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곧 회사로 갈 테니까 오너에게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말하고 마동은 전화를 끊었다. 마동은 겨우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보지만 전날 먹은 음식이 없기에 배변은 없었다. 소변만 조금 나왔고 유난히 투명했다. 일말의 찌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고양이 세수정도로 얼굴을 씻으려고 물을 양손으로 떠서 얼굴에 묻히니 얼굴이 따끔, 따끔거렸다. 머리를 감으려고 했지만 어지러워서 그냥 양치질만 하고 출근준비를 하려 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질을 하면서 거울을 봤다. 하마터면 놀라서 칫솔을 떨어뜨릴 뻔했다. 얼굴의 볼 살이 하룻밤 새 반이나 사라져 버린 듯 퀭했다.


자세히 보니 실지로 사라져 버린 건 아니었지만 심하게 못생겨 보일 정도로 수척해 보였고 눈두덩이 푹 꺼져 있었다. 눈은 어쩐지 탁하고 생기가 소멸되어 버린 꽃처럼 희미해진 눈빛이었다. 아주 연한 수채화의 그림처럼. 그래서 눈썹은 더욱 진하게 보였고 피부는 몸살기운 때문인지 건초더미처럼 푸석푸석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아주 창백하게 보였다. 핏기가 걷혀있었다. 심상치 않은 몸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갑갑하더니 숨을 쉬는 것이 어제보다 더 힘이 들었다.


어찌 되었던 밤새 작업한 리모델링 디자인 파일을 들고 출근을 해야 한다. 클라이언트가 한 시간 후에 회사로 와서 앞으로의 리모델링 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프레젠테이션을 들을 것이다. 마동은 팔, 다리가 자신의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거웠고 따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마동의 팔을 들어서 이렇게 봤다. 어떤 학명도 없는, 바다밑바닥에 살고 있는 심해어의 팔을 뚝 뜯어와서 인간의 팔 모양으로 만들어 자신의 팔에 부탁시켜 놓은 것 같았다. 이상하고 이상했다. 불쾌한 느낌이었다.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나의 팔도 전화벨소리처럼 내 목소리처럼 이질적이다.


욕실에서 마동은 팔 동작이 평소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놀라는 일이 일어날까.


마동은 옷을 입고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니 여름 태양의 열기와 쏘아대는 선 라이트가 가마솥의 뜨거움과 맞먹었다. 아스콘과 시멘트바닥은 어제보다 더 뜨거워진 태양의 열기를 복사시켜 대기를 데우고 있었다. 숨을 쉬기가 거북한 날이었다. 계절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계의 틀을 여름에 맞게 바꾸고 있었다. 오늘부터 장마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휴가철의 진정한 여름의 나날이 펼쳐지려 했다.


마동은 태양의 빛을 피하기 위해 노트북을 이마 부분에 대고 태양빛을 가렸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차양 막 밑에서 본 태양은 무섭도록 이글거렸다. 정말 무서웠다. 순수한 시간처럼 태양도 순수했다. 순수한 것들은 무섭다. 태양이 진정 무섭다고 마동은 느꼈다. 사람들도 태양빛이 싫어서 여자들은 양산을 쓰고 남자들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길거리의 그늘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고 있었다. 무서운 태양을 쳐다보니 태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나의 흑점으로 보이는 것이 기이하고 이상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불타오르는 기분도 들었다. 주위의 빛의 띠는 보이지 않고 동그란 모양의 태양만이 또렷하게 망막으로 들어왔다. 마동의 눈동자 속에 태양은 하나의 흑점이 되어 저 먼 곳에서 거칠게 내려와 마동의 눈 속으로 과격하게 침투했다. 세상의 어둠이 덮치는 것보다 태양의 빛은 더 무서웠다. 그 빛에 닿아서 눈이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서운 태양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동은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갔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직원들이 전부 마동에게 시선을 돌렸고 수척해진 마동에게 괜찮으냐고 한 마디씩 했다. 마동은 괜찮지 않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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