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고, 시간이 1

지나면 알게 되는 건 알게 된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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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아주 맑고 차가운 날이다. 이렇게 맑은 날의 겨울 오전은 어쩐지 불안하다. 흐리고 잿빛 가득한 겨울의 아침이면 오히려 덜 불안할 텐데. 몇 시간 흘러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다. 맑은 겨울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잿빛이 가득하다. 그러면 덜 불안해야 하는데 오전의 그 맑았던 하늘이 그리워진다. 어째서 인간은, 아니 나는 이토록 오락가락하는 것일까. 방금까지 좋아했던 것들이 금방 싫증 나고, 욕하고 싶어진다. 나는 별로인 인간의 전형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단지 표현에 서툴러서 그렇지 내 안에 있는 나는 그런 인간이다.


초등학교 때에도 친구가 별로 없었다. 3학년 우리 반에 샤프 끝부분으로 손톱의 때를 자주 벗겨내는 녀석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공부는 뒷전이고 그게 그 녀석이 수업 시간에 하는 일이었다. 그 녀석은 커트칼로 손톱의 큐티클도 자주 잘라냈다. 그래서 손톱이 깔끔했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항상 손톱 밑에는 때가 껴 있었고 지저분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더러운데 더럽지 않았다. 당시 우리의 손은 대부분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교실에 있지 않고 그 녀석과 운동장이나 화단 근처에서 5분이라도 놀다가 들어왔다. 그 녀석의 손은 마치 기계공이 열심히 기계를 만진 손처럼 보였다.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어쩌면 부자연스러웠다. 씻었는데도 한 시간 후에 보면 손톱 밑이 지저분했다. 그 녀석의 나의 단짝 같은 친구였다. 늘 그 녀석과 함께 하굣길에 올랐다. 학교에서 나오면서부터 재미있기 시작해서 집까지 오는 동안 내내 재미있었다. 아이들 대부분 학교에서 집까지 15분 정도 걸렸다. 그 15분 안에 별의별 것들이 가득했다. 그 녀석과 집으로 오면 15분 거리가 30분으로 늘어나기도 했고, 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똑같이 걷고 장난치고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왔는데 그 녀석의 손톱 밑은 유독 새까맣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녀석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 녀석과 나는 일요일이면 시내에 있는 떡볶이 골목으로 가서 떡볶이를 먹고 그 골목에 있는 도깨비백화점에 가는 걸 즐겼다. 도깨비백화점으로 이끈 사람이 그 녀석이다. 도깨비백화점은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 녀석은 장난감이나 작은 소품을 무척 좋아했다. 도깨비백화점 안에는 여러 매장이 있었다. 그 대부분이 소품 매장이었다. 그 녀석이 오래전에 엄마와 함께 도깨비백화점에 왔다가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후로 도깨비백화점에 가서 소품 이것저것을 만지다가 손톱이 더럽다며 혼이 났다.


그 녀석의 말을 듣고 도깨비백화점에 가니 딴 세상이었다. 당시 집에서 도깨비백화점에 있는 시내로 가려면 한 시간은 걸어야 했다. 그 한 시간이 그때는 길어 보였다. 자주 가는 곳이 아니라 혼자서는 가지 않다가 친구가 생기면 시내로 가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그 녀석과 나는 주말마다 도깨비백화점에 가서 구경했다. 도깨비백화점은 1층 밖에 없었고 기억자형 구조로 다른 상점가보다 길었고, 1층에 소품 가게들이 죽 붙어 있었다. 한두 매장이 시계를 팔거나 뜨개질 같은 실을 파는 매장이었고 나머지 전부 소품 매장이었다. 남대문의 예전 두타 속 소품 매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도깨비백화점은 시내에 있는 대형 백화점보다 신기한 게 많았다. 재미있는 소품들이 가득했다.


그 녀석이 마음에 드는 모형이나 장난감을 만지려고 할 때 주인이나 관리인이 나타나서 못 만지게 하려는 낌새가 느껴지면 내가 대신 만졌다. 그리고 그 녀석에게도 슬쩍 내밀었다. 도깨비백화점에서 그 녀석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손톱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만지작 거리고 그 녀석에게 내미는 식으로 우리는 돌 다 소품을 만져보며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소품을 구입할 돈은 없었다. 한 소품 매장에는 나무로 만든 장난감 위주의 물건들이, 또 다른 소품 매장은 인형이 종류별로, 그림이나 실크 스크린 같은 작품을 판매하는 매장도 있고,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처럼 수입소품이 가득한 매장도 있었다. 온통 신기한 것뿐이었다. 문방구나 우리가 평소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문을 열고 도깨비백화점을 나오면 떡볶이 골목이었고 전통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꿈속에서 무의식 적으로 만들어 놓은 전통시장의 모습이 있다. 꿈을 꾸면 나타나는 시장의 모습이다. 꿈을 꿀 때마다 그 시장 속을 거닌다. 일반적인 시장을 걷는 것과 다르게 걸으면 걸을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러다가 시장에서 절벽으로 이어지거나 설명할 수 없는 주택단지로 이어진다. 시장 안에는 법정이 있는데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음식을 시켜 먹고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말이 없다. 어딘가 전부 아파 보이는 얼굴이며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나는 자꾸 그 안으로 들어간다. 시장의 도깨비백화점은 꿈속에서 본 정경과 비슷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꿈이라고 해서 전부 비슷한 느낌은 아니다. 실제 같은 꿈이 있고, 이건 꿈이야 하며 허무맹랑한 꿈이 있다. 악몽이 있고, 기분 좋은 꿈이 있다. 비슷한 꿈은 있지만 같은 꿈은 없다. 도깨비백화점은 꿈속 같았다. 도깨비백화점 안은 밖과 달리 다른 세계였다. 대형백화점보다 도깨비백화점이 우리는 훨씬 좋았다. 대형백화점처럼 놀이기구나 오락실은 없었지만 그 녀석과 나는 장난감과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도깨비백화점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내려가지 못하게 펜스를 쳐 놓았다. 계단 아래는 원래 패밀리 식당이었다. 이 근처에서 최초로 경양식 돈가스도 팔고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손님으로 붐볐다는데 어느 날 지하의 음식 코너가 전부 없어졌다. 장사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근처에 맥도널드 같은 음식 프랜차이즈가 서서히 생겨나고 편의점이 들어사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아직 우리는 어렸고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그 녀석의 말은 달랐다. 지하에서 나는 소리 때문이라고 했다. 그 소리는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소리. 예전에 엄마와 왔을 때 엄마는 쇼핑을 하고 그 녀석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소리, 그로울링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소리는 지하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펜스는 없었다. 그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불이 꺼져 있어서 누구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 녀석의 손톱 밑에 때가 끼는 건 그때 그 소리를 쫓아서 지하로 내려갔을 때 깜깜한 그곳에서 무엇인가가 그 녀석의 손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그 감촉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뒤로 그 녀석의 손톱 밑에는 때가 자꾸 낀다고 했다. 누구도 그 녀석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나는 그 녀석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단지 그 녀석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집중을 했다. 그 녀석은 내가 자신의 말을 믿고 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나도 긴가민가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믿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 녀석은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주의였다. 그 지하에서 소리를 내는 건 외계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도깨비백화점에 자주 오게 되었다. 주말이면 도깨비백화점으로 와서 소품구경을 하고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펜스 때문에 지하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 녀석의 말로는 화장실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 계단 앞에서는 지하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하에 있는 존재가 내는 소리는 화장실의 작은 창으로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도깨비백화점에 구경할 거리가 많다고 해도 대형백화점보다는 훨씬 작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안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물건을 구입할 형편도 아니었다. 한 시간 정도 구경을 하고 그 앞의 떡볶이 골목에서 떡볶이를 먹곤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것과는 무관하게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피에로 인형부터, 코뿔소 모형, 비행기 프라모델까지. 겨울이 오면 점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바뀌었는데 건물 안이 전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거려서 재미있었다. 도깨비백화점은 대체로 조용했다. 은은하게 음악이 나오고 있었지만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았고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주인이 매장을 지키기도 했지만 비워두고 어딘가에 있는 매장주인들도 있었다. 그래서 소리가 좀 크다 싶으면 쉽게 들렸다. 요컨대 시계를 파는 매장에서 손님과 하는 대화가 복도 밖으로 다 들렸다.


이제 좀 있음 모든 게 변할 거야, 같은 대화가 들렸다. 그 녀석이 나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시계 매장 옆에서 어정쩡하게 구경하는 척 대화를 더 들으려 하는데 관리인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그곳을 나왔다. 유동인구가 적은데 소품이 가득하고 누군가 소품을 옮기고 진열하고 새로 갖다 놓는다. 그 녀석은 촉을 발동했다. 누군가 소품을 계속 갖다 놓고 배치를 하는 건 아마도 지하에서 소리를 내는 외계존재가 그렇게 유도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유도?]

[아마도 사람들을 조종하는 거야]


그 녀석은 평소에도 외계인 같은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티보다는 좀 더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들. 그 녀석이 관리인의 손톱을 잘 보라고 했다. 앗, 지저분했다. 어른인데 관리인의 손톱이 저렇게 지저분한 건 매일 지하에서 소리를 내는 외계존재와 접촉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관리인의 얼굴이나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항상 무표정하고 의자나 벤치에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이상했다. 저런 관리인은 처음 봤다. 그 녀석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지하에 있는 외계 존재와 딱 한번 접촉을 했기에 아직 그 존재가 유도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지하에 있는 외계존재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최초가 될 거라고 그 녀석이 말했다.


그 녀석은 외계인이 우리 인간들 사이에 숨어서 지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특히 매일 같이 놀고 공부도 안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는 애는 외계인이거나 외계인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녀석이 좋다. 그 녀석은 외계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괴수 대백과사전도 다 꿰도 있었다. 그런 책이 많았다.


[내가 이렇게 자주 손톱 밑에 때를 샤프로 긁어내잖아. 그런데도 좀 만 지나면 때가 껴 있거든. 이게 다 그 도깨비백화점 지하에 있는 외계존재와 접촉을 해서야. 그것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 지하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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