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의 반대말은 검소가 아니라 비천이라니?
마) 사치의 한계선 (3쪽)
사치 : 자기의 처지에 마땅한 한도를 넘치게 옷.음식.거처 따위를 치레함.
사치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왜 이 시대에 사치가 중요해지고 있을까? 과거 사치란 그들만의 잔치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에게 보여지고, 강요되는 규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 보여주었던 궁정생활의 호화스러움은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전, 모스크바의 크레믈린궁전등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영주가 살던 성 또한 호화스러움으로 치장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귀족들만의 생활방식이었지, 일반 농민이나 장인들의 생활방식은 아니었다. 또한 귀족들과 서민들의 주거지는 떨어져 있었으며, 귀족들의 생활은 단지 소문만으로 들을 수 있었기에,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우선 주거 지역의 분리가 낮아졌다. 물론 여전히 상류층, 중류층 및 하류층이 사는 지역은 분리가 되어있지만 통행에 허가를 받거나 출입이 금지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게다가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상류층(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최상류층)의 생할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영화, T.V 드라마에서는 엄청난 저택, 화려한 가구로 가득차 있는 아파트, 최소한 1억원은 넘어갈 듯한 자동차들을 이용해서 보여지는 최상층의 생활이 화려한 색상과 움직이는 영상으로 실감나게 보여준다. 보지 않으면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사치를 할 재간이 없다. 하고자 하여도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설령 어렵게 사치를 하였다하여도 남들에게 알릴 방도도 마땅치가 않았다. 어차피 사치란 남이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지, 혼자만 알아서는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Alloy Yacht(요트), La Perla(란제리), Harry Winston(보석), Lazy Man(야외용 그릴), Galliano(여성복 디자이너), Omas(펜) Luigi Borrelli(셔츠), Bobby Jones(골프복)을 알아주어야 하는 데, 매스미디어가 알려주지 않고는 누가 그런 사치품들을 알 수 있겠는 가?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만하여도 사치란 그리 몸에 와닿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도 사치란 그리 건강치 못한 단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치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권장되면서, 또한 강요되고 있다.
“사치의 반대는 가난이 아니라 비천함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사치스럽게 행동할 수 있으며, 부유한 사람들도 통속적이고 비천할 수 있다는 것이 코코 샤넬 논지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상품은 윤리적 차원과 미적인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로의 구별을 하자는 것이 사치고, 아래로의 평준화는 비천함이다. 비천함은 마구 섞어 만든 잡탕찌개와 같다. 가령 포르노 극장에 가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오페라 관람용 쌍안경을 가지고 간다거나, 값싼 알디 수퍼마켓에서 고급 샴페인을 찾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윤리적.미적 차원은 구매력과는 단지 부수적으로만 관계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사치란 가난한 사람이라도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미적 취향을 맞추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싸구려’를 고급 취향의 제품이라고 알아주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자기 스스로도 사치라고 생각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사치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과시를 하지 못하고, 싸구려 제품은 사치가 될 수없다. 그녀의 말에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주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마저 없애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알든 모르든 간에 ‘비천함’내지는 ‘비참함’에서 빠지지 않고자 사치를 한다.
이스털린 패러독스처럼 사람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불행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귀족의 사치는 신분의 차이로, ‘성채’라는 주거의 차이로 쉽사리 받아들여지거나 무시될 수 있었지만, 같이 사는 이웃의 사치는 쉽게 허락하기가 쉽지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기대를 부풀리는 일차적인 원인은 탐욕이 아니라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과거의 사치란 전반적인 소득수준에 비하여 소비가 과도함을 의미하지만, 현재의 사치란 전체적인 소비는 소득의 한도내에서 유지하되,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실제로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함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이 사치하는 만큼 다른 부분에서는 ‘자린고비’를 하는 합리성을 지닌다. 사치를 부려서도, 부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정된 범위내에서 하는 소비행위에 불과하며, 스스로를 기만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만족을 느끼기에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결국 Luxury marketing을 해야 하는 기업이나 합리적 사치를 해야하는 현대의 소비생활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오늘날 진짜 사치스런 삶이란 ‘본질적인 것’을 누리며 사는 삶을 말한다. ‘본질적인 것’이란 과도하고 장식적인 것이 아닌, 쓸데없는 거동이나 허세의 모든 형식을 포기하는 것을 일컫는다. ‘본질적인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의 환원이며 이로써 ‘단순 소박함’을 장점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사치중의 최고 사치는 분명 ‘시간’임이 분명하다. 기능직 엘리트뿐 아니라 중산층 역시 시간이 없다. 대개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는 것이다. 업무 일정표 상에는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가정주부의 경우 아이들의 학교 일정 및 여가 활동 그리고 가게 문 닫는 시간 등이 그들을 구속한다. 한때 가격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었던 핸드폰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유형의 ‘사치인간’으로부터 야유 어린 조를 받아야만 했다. 소유주의 시간을 제약하고 제어하는 핸드폰이란 결코 사치품이 아니면 단순히 유행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로 사치란 나의 일정표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다. 내가 내일이나 모레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선 나도 아직 모른다. 단지, 무엇을 할지는 내가 정한다. 시간 요소는 전통적 사치의 개념 중에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 다시말해 사치에서 시간은 모든 것의 열쇠다” 사치는 결코 단시간에 생산되는 게 아니다.
현대의 호사품들은 은연중에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당신을 위해 돈을 아끼지 마세요, 당신은 오늘 쉴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스스로를 후대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