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aka, kyoto ver.
둘째 날의 시작은 내 인생에서 손꼽히도록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밟히면서 깼다. 말 그대로 밟히면서. DDR 게임을 해보았나? 어어 그 스텝 밟듯이 밟혔다. 내 기억엔 존재하지 않았지만 내가 너보다 먼저 씻으러 갈 것이라며 호언장담을 했고, 네가 씻고 돌아올 때까지도 난 자고 있었고 그래서 밟혔다. 상큼하게 밟히며 시작된 둘째 날에 대한 감상을 먼저 던지고 시작하자면, '드라마틱(dramatic)' 그 자체랄까? 발단-전개-위기-결말의 플롯 구성을 꽉꽉 채운 일들이 터지니 기대하시라.
아침은 언제나 그렇듯이 생략! 둘 다 딱히 꼬박꼬박 매 끼니를 챙겨 먹고 그런 타입의 인간들이 아니었다. 숙소에서 오렌지 스트리트까지 걸어가며 오늘 저녁 하울의 대상인 로손(Lawson)도 눈여겨보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바라보았다. (숙소 위치가 새삼 좋음을 다시 한번 느낀 것이 오렌지 스트리트까지 걸어서 15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실질적으로 난바역에서는 모든 관광 명소들이 가까운 셈.)
오렌지 스트리트가 어디일까 어디일까 하며 걸어가다 보면 아 여기구나 싶은 지점이 딱 보인다. 잠실 출근 바이브가 갑자기 가로수길 쇼핑 바이브로 전환되는 그 순간. 이 곳이 오렌지 스트리트구나, 를 알 수 있다. 방문일이 수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필 그날 가려고 했던 빵집 페사(Pesa)가 문을 닫았었다. 그래서 뭐 냉큼 그 맞은편에 있던 바이오탑(Biotop)에 들어갔는데 초록초록한 인테리어가 참 인상적이던 곳이었다.
그 건너편엔 이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알록달록한 샵이 있었다. 힙합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무언가를 구매하기엔 색감과 프린팅이 내게 너무 과한. 그런데 전반적으로 디피 되어있는 분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너를 끌고 들어가다시피 했다가 그대로 한 바퀴 돌고 나왔다지.
오렌지 스트리트에는 볼 것이 많았고 그것들은 한없이 비쌌다. 소품 하나하나에 취향저격당하던 가구와 빈티지샵, 모던함으로 중무장해놓고 화려한 마말레이드로 매력 어필하던 인테리어 가게, 우당탕탕 하다가 네가 새로운 포터 에코백을 장만하게 되었던 그 편집샵, 그 외에도 수많은 가게들. 볼수록 뭐랄까 너무 예쁜데 그래서 서글펐다. 요즘 무슨 드라마에 나온 대사였는데. '예쁘다. 슬프게.' 그렇다. 한없이 예쁜데 그게 내게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슬펐다. (물론 드라마 상의 대사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현재의 순간이 너무 예쁘기에 아무리 같은 순간을 마주하더라도 그보다 못할 것을 직감해버린 주인공이 자조하듯 뱉었던 말 같았다. 저건 그냥 내 자본력의 부족이 데려온 슬픔이지만.)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이 서글픔이 피곤함과 얽히면 얼마나 위험한지.
실컷 오사카의 젊음을 만끽했다. '아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껏 멋을 부리고 패피로 중무장하여 이 거리를 활보하겠구나.' 우리나라의 가로수길, 해방촌이 요즘 그러하듯. 오렌지 스트리트에서 쭈욱 걸어 나가다 보면 금방 아메리카무라에 다다를 수 있다. 오렌지 스트리트가 가로수길이라면 아메리카무라는 홍대 같다는 여행 동반자의 찰떡 비유가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아메리카무라를 가는 길에 정말 생뚱맞게도 해리포터 공식 굿즈샵이 있더라.(영국과 제휴를 맺고 있는 공식 대리점이었다_띠용) 그래서 덕분에 헤드위그에게도 인사를 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 보이는 저 셔벗 모히또는 길을 걷다 무작정 들어간 카페에서 마시게 된 아이인데, 저 자그마한 용량에 비해 가격이 좀 터무니없었던 것 같다. 720엔이었나. 예쁘고 차갑다 외에는 별다른 기능과 감상이 존재할 수 없는 음료였다. 그러나 '예쁘니까' 자랑하고자 사진을 실어보았다.
저 셔벗 모히또를 마시며 먹으며 걷고 걷다가, 또 무언가에 홀린 듯이 빈티지 샵에 입장하게 된다. 구제 밴드 티셔츠, 청자켓, 청바지, 원색이 쨍하던 리미티드 버전의 각종 티셔츠들. 거기서 또 한 세월을 보내고 빌리지 뱅가드에 갔었다. (이 부분에 대한 사진은 왜 없냐면 밴드 티셔츠를 들고 너무 신나 하던 여행 동반자의 해맑은 전신샷 밖에 없어서.) 빌리지 뱅가드가 돈키호테보다 한 수위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돈키호테도 참으로 랜덤하고 보물찾기 같은 제품 진열로 유명했는데, 빌리지 뱅가드는 그냥 미로였다. 사실 내게 빌리지 뱅가드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하이피치의 보컬로이드 음악과 정신없고 빽빽하게 진열된 상품들, 무언가를 떨어뜨릴까, 망가뜨릴까 노심초사하며 내디뎌야 했던 모든 걸음들, 그리고 구경 끝자락에 머리를 띵하게 하던 정체 모를 눅눅-꿉꿉한 냄새까지. 정말 머릴 부여잡고 걸어 나와 벤치에서 5분 넘게 멍 때렸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다리던 드라마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사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같은 발화가 한 30분 반복되었던 것 같은데. 저녁을 먹기엔 시간이 너무 애매하게 떠버렸고 숙소로 돌아가자니 시간이 너무 아깝더랬다. 오렌지 스트리트에서 아메리카무라 그리고 다시 오렌지 스트리트. 목적성이 딱히 없었다 나는. 사실 무언가가 막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타지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구나, 여행에 왔구나. 너는 보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이 많구나. 그러니까 'want(원함)'(이)가 주는 생동감과 활력으로 가득 찬 사람이구나. 나는 근데 왜 갖고 싶은 것도 뭐가 보고 싶지도 않지? 못 가질걸 알아서 그런가? 어제랑은 뭐가 다르지? 현재를 살며 미래만 걱정하는 병이 도진 건가. 그렇게 미적지근한 자기 성찰을 계속하고 있는 내가 너한테는 굉장히 떨떠름해 보였나 보다.
어딜 가고 싶냐고 너는 물었고 나는 없다고 답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사실 그건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그 순간의 나는 뭐랄까, 의욕이 없었달까. 뭐하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모르겠는데.'라는 어정쩡한 답밖에 돌려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걸 했으면 했고,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이번 선택 역시나 그럴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무책임할 정도로 중립적인 태도가 널 신경 쓰이게 했고 저렇게까지 갈 줄 알았더라면 내가 더 노력할 걸 그랬다.
'어젠 너 안 이랬잖아. 뭐가 문젠데.'
'어제의 나는 어땠는데. 나도 뭐가 문젠지 모르겠는데 뭐라고 답해야 해? 그냥 너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거잖아. 그게 왜 싫어? 네가 좋은 걸 해서 너가 좋고 나도 좋으면 다 된거 아니야?
'같이 여행을 왔는데 넌 하고 싶은 게 없어? 너도 뭐가 먹고 싶다거나 가고 싶다거나 그런 게 있을 거 아냐. 여행을 둘이 왔는데 둘 다 좋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고 싶고 가고 싶고 딱히 없는데. 알잖아, 나 기호 없는 거. 지금 나 좋아.'
'기호가 없다는 게 말이 돼? 넌 좋고 싫은 게 없어? 싫은 게 없냐고. 싫은 게 없으면, 그래 니말대로 좋으면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그러고 있는 건데. 말도 안 하고. 뭐야 계속 나만 묻고 말하고 넌 단답으로 답하고.'
'미안해, 뭐라고 답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할 말이 있어야 하지. 굳이 매 순간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도대체 이건. 싫은 게 없으면 좋은 티를 내. 신나하라고. 웃던가. 나만 결정하고 나만 물어보고 이게 뭐야 둘이 같이 여행 온 거 아니야?'
'같이 여행 온 거 맞고. 니가 좋은 거 나도 좋으니까 이렇게 있는 거야. 싫으면 싫다고 말했겠지.'
'어 니가 퍽이나 그러겠다. 너 진짜 짜증 나.'
'나 때문에 짜증 나면 따로 가. 난 내가 갈 데 갈 테니까 너는 니가 가고 싶은데 가. 여행까지 와서 니 기분 내 기분 망치고 싶지도 않고 싸우고 싶지도 않아. 그러려고 이 돈 주고 온 것도 아니고.'
'일본어 하나도 못하면서 뭘 어딜 가.'
'넌 내가 그렇게 짜증 나면 왜 같이 왔어 왜? 왜 또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 대화를 지금 여기서 또 하자고? 이 상황은 뭐 맨날 되풀이되냐. 왜 맨날 이러고 있는 건데.'
'관둬, 관두면 되지.'
길바닥에서 저러고 싸웠다. 가만 보면 웃기지. 들어가서 싸우던지, 서서 싸우던지, 그냥 걷던지, 아예 입 다물던지. 한 가지만 할 것이지. 굳이 걸으면서 계속 저러고 싸웠다는 게 웃기다. 저 대화의 진행에 따라 언성도 높아져서 횡단보도 구석에서 담배 피던 아저씨들이 아침 막장극 보듯 우리를 흥미롭게 쳐다봤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걸 다 알면서도 민망한 줄 모르고 계속 저랬다.
내 책임이 전적으로 컸다. 나도 안다. 내가 애매하고 미적지근하게 굴었고 여행 와서 그러고 있는 건, 특히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 명이 그러고 있는 건 치명적인 거 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지,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해야 내가 다시 정상궤도에서 웃을 수 있는 건지 나조차 모르겠는데 그래서 스스로도 굉장히 한심한데 뭐가 좋냐고 물으면, 무엇이 하고 싶냐고 물으면 내가 어떤 대답을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내 몫까지 네가 노력하는 것도 알았고, 너 역시 피곤하고 힘들 거 다 아는데 내가 같이 으쌰 으쌰 하지 못한 것도 알았고, 그래서 네가 속상해한 것도 이해했다. 다 알면서도 뭘 어쩌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제일 화가 났는데, 자꾸 무언가 결정하기를 채근하는 너에게도 속은 상했다. 딱 한 순간만 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그런 널 보면서 흐르는 시간이 날 괜찮게 해주지 않을까, 라는 미련한 마음도 있었다. 그랬는데 기여코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내 이성도 날아갔더랬지.
'너 질린다.'
이 발화를 왜 여기서 하고 있는 건지, 여행 와서 싸운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건지. 사실 그냥 다 필요 없었다. 내가 일본어 한 마디 제대로 뱉지 못하는 것 역시 상관이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더 같이 있다가는 정말 바닥에 짐을 다 내팽개치고 울 것 같았거든. 기를 쓰고 여행을 와서 듣게 되는 소리가 결국 다시 저거구나. 확인 사살을 받으러 온 걸까, 너랑 내가 맞지 않고 그냥 애쓰기 때문에 유지되는 관계라는 사실을?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환경이 바뀌어도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는 사실에서 온 현타가 가장 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누가 잘못한 것 같나? 난 다시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별로라는 말도, 질린다는 말도, 짜증 난다는 말도 뭐 그리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한두 번 듣는 말도 아니고 말이다. 그때 내가 정녕 혼자 백화점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고, 너는 어디론가 갔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으려나.
그래도 나는 객기를 부리며 스타벅스에 혼자 들어갔더랬지. 아득바득 줄에 서서 혼자 주문하고 계산까지 했더랬다. 원래 주문은 언제나 너의 몫이었고 나의 역할은 옆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계산하는 것.
넌 내가 질리고 화나고 짜증 난다며, 각자 혼자 있자는 내 말에는 극구 반대했다. 그 부분은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네가 현명했음은 인정한다. 넌 다 됐으니까 그냥 옆에만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뭘 먹은 게 없어서 환멸이 난 걸지도 모른다며, 난바 파크스에 유명한 크레이프 집이 있으니 거기 가서 케이크나 먹자고 했다. 난 멍청하게도 그 말에 뭘 느끼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전자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후자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는 아직도 제대로 판단을 못하겠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자연스러워 보이려나? 넌 잘 몰랐겠지만 정말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난바 파크스 입구에서 어딜 가고 싶냐는 말에 또 없다고 해버리면 정말 수습이 안될 것 같아서. 꼼데 가르송을 냅다 짚었다. 거기 가고 싶다고. (평소에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갖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오픈 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입장하며 가디건과 티셔츠는 진즉에 다 빠진다는 것을, 깨작깨작 하루를 연명하는 20살에게 꼼데가르송 한 벌이 치명타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웃긴 건 난 평소에 1. 과일 케이크 2. 크레이프를 먹지 않는다. 과일에 생크림 얹은 류를 다 피하는 편이다. 애매한 단 맛과 생크림의 니글거림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 비워도 가시지 않아서. 그런 내가 두 개를 한꺼번에 먹어보았는데 나쁘지 않았다. (띠용)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 납득해버렸다. 그런데 크레이프보다 감동적이었던 건 저 뒤에 보이는 저 코코넛 티다. 코코넛 향은 좋아하지만 도대체 어떤 맛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얼그레이로 선회했던 것이 케이크를 먹는 내내 후회될 정도로 깔끔하고 진하며 기분 좋은 코코넛 향이 잔류하는 차였다. 케이크를 먹는 동안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지금 와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양가 없는 시시껄렁한 농담이 넘실댄, 어지간히 애를 쓰며 이어간 실없고 안쓰러운 대화였겠지.
합스를 나와서 둘이 무엇을 했냐 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난바 시티로 폭풍 쇼핑을 하러 갔다. 빔즈(BEAMS)에 가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너는 티셔츠 한 장을 샀고, 컨버스를 안 사갈 수 없지 않냐며 ABC 마켓으로 향했다. 사실 일본 ABC 마켓의 컨버스가 우리나라의 것보다 저렴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 가격은 한국과 다를 것이 없었다. 코코아를 닮은 독특한 색감의 컨버스, 일본 생산라인에서 나온 아주 짱짱하게 가볍고 쌔끈한 컨버스가 있을 뿐,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쌔끈한 컨버스가 여간 쌔끈빠끈한게 아니었다. 컨버스에서 '폭신'하다는 느낌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되더라. 가볍고 폭신한 컨버스라. 컨버스 처돌이인 나와 여행 동반자는 개발자에게 노벨 평화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컨버스 한 통씩 집어 들고, 텅 빈 지갑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사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1일 1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1식이 늘 호화스러웠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소비가 우리에게 포만감을 주던 것일지도...) 둘째 날 저녁은 야끼니꾸였다. 성인 기준 부가세 포함 4082엔, 약 4만 원 정도였는데 따라서 둘이 한 끼에 8만 원을 긁은 꼴이 되었다. 그러나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야끼니꾸 무한 리필이 가능한 아부리야 센니치마에점에 갔는데, 2시간 타임어택이 존재하지만 질 좋은 고기를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었다. 등심을 거의 4번 리필하고 안심과 채끝이었던가 하여튼 소를 위주로 미친 듯이 구워 먹다가 2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나왔던 것 같다. 어찌나 신이 나서 구워 먹었던지. 아, 아부리야의 고기는 기본적으로 양념이 되어 나오는데 똑똑한 우리의 여행 메이트는 '노 소스 쿠다 사이' 기술을 발휘하여 나를 오만가지 양념으로부터 구해주었다. 순수한 소의 맛, 그것은 천국이었더랬다. 마지막에는 디저트까지 골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꽉 채워 먹지는 못했어도 전혀 후회는 없었다. (나중 가서는 어제도 그러했듯 서로의 디저트를 벌칙으로 먹이기에 바빴다.) 그렇게 양껏 먹고 나왔더니 비가 추적추적 오더라. 도자기 시장을 구경하고 싶었다는 여행 메이트. (안타깝지만 실패였다고 내가 꽤나 놀렸던 것 같다.) 이미 닫아버린 상점가를 뒤로하고 8시 반쯤 숙소에 다시 들어갔다.
그대로 하루를 마감하였는가? 전혀. 성격상 둘 다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다. 여행을 왔는데 숙소에서 시간을 뻐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알 수 없는 부지런함 모드의 장착. 한국에 있을 때의 둘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각자 집에서 나오기 위해 1시간가량의 고민과 1시간가량의 설득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침대에 누워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2일 치 한큐 패스는 연속 이틀에 걸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난바역으로 뛰쳐나갔다. 햅파이브는 오늘 타야 하는 것이라며. (햅파이브를 타는 것은 그렇게나 기호가 없던 내가 한결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일한 것이다. 나는 어딜 가든 대관람차 타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비도 추적추적 오는데 우메다역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여행 내내 나의 여행 메이트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 주로 사진을 찍고, 나는 아이폰 XR으로 사진을 찍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던 햅파이브는 둘을 아무 말도 없이 셔터만 누르게 하기 충분했다. 한큐 패스 덕을 톡톡히 보며 햅파이브에 무료로 탑승할 수 있었는데 빨간 공이 하늘에서 데구루루 굴러 내려오더니 문이 찰칵하고 열리는 광경은 언제 생각해도 유쾌하다. 가장 후회했던 것은 아이폰 잭을 가져가지 않았던 것. 내가 알기로 관람차 안에 스피커가 있기 때문에 본인이 잭을 가져가면 관람차 안에서 직접 원하는 노래를 틀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까먹은 내가 있었고, 덕분에 쿠사리를 많이도 먹었더랬다. '시티팝을 들으며 오사카의 야경을 볼 기회가 또 언제 있겠나'라는 말은 뼈를 때리다 못해 나를 골절시키기고 남았다. 사실 다시 햅파이브를 타고 야경을 보는 것은 '언제라도' 될 수 있지만 20살의 나와 나의 여행 메이트가 관람차 안에서, 그때의 음악 취향을 한껏 담은 Plastic Love를 들으며 오사카를 내려다볼 기회는 '다시' 없을 걸 알아서 울적해졌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없는 것을.
평화롭다. 아름답다. 오사카의 여름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져 겨울의 중심을 걷고 있는 지금 남아있는 그때의 감각은 저 두 가지밖에 없다. 야경을 보기 위해 요리조리 자리를 관람차 안에서 옮길 때마다 나던 끼릭끼릭 소리도, 회전 각도에 따라 때때로 비치던 붉은빛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지만 소음을 뚫고 나오지는 못하던 시티팝도 그냥 다 좋았다. 한국과는 모든 것이 이질적이라 가장 좋았다. 다르다는 것, 내가 타지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모든 소리가 반가웠다.
관람차에서 내려 나오는 길에 관람차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건져보겠다고 거의 바닥에 드러눕다 하여 햅파이브와 찍던 사진들이 기억난다. 결국 그 사진들 중 베스트 컷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은 로손(Lawson)을 털어 보았다. 아마도 로손 편의점 음식들이 가장 사랑스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에그 샌드위치. 보이면 집어서 바로 결제해라. 후회하지 않을 것.
오늘도 각기 다른 녹차들을 샀고 에그 샌드위치를 입에 하나씩 물고 터덜터덜 숙소에 가다가 버스킹을 하고 있던 밴드를 보았다. 'Shule And Christmas'라는 밴드였다. 노래를 여기에 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척이나 청량한 사운드를 자랑하던 밴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기타를 치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노래를 하며 그들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보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기꺼이 CD나 노래를 결제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나의 지갑은 노래 한 곡에 5000원을 쓸 만큼 여유롭지 못했고, 숙소에 돌아와 iTunes에 밴드 이름을 검색하고 그들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SNS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보답이었다.
오늘에 대한 소감은 '다행이다' 랄까. 이쯤에서 모멘텀에 대한 정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원래 모멘텀은 물질의 운동량이나 가속도를 의미하는 물리학 용어지만 주식투자에서 흔히 주가 추세의 가속도를 측정해 주가의 변동 상황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쓰인다. 즉 주가가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 모멘텀의 기울기에 따라 얼마나 더 상승할 수 있는지, 또는 주가가 하락하고 있을 때는 얼마나 더 하락할 것인지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추세분석의 기초가 된다. (시사경제용어사전, 2017. 11., 기획재정부) 그러니까 모멘텀이란 추세분석의 단위이고, 변수가 같은 방향으로 변동하려는 경향 즉, 가속률인 것이다.
행복의 모멘텀은, 나의 행복이 증가 양상을 띄든 감소 양상을 띄든 그것에 가속도가 붙었음을 의미한다. 가속도는 어떻게 붙었는지, 왜 붙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붙었는지. 나의 기행문은 그것들에 대한 것이다. 여행 첫날은 양의 방향으로만 모멘텀이 작용했다. 끝도 없이 행복해서 그냥 그 하루에 갇히고 싶었더랬다. 둘째 날은 모멘텀이 음의 방향으로 붙더라. 모멘텀이 음의 방향으로 엑셀을 아주 끝까지 밟아버려서 그대로 인천까지 갈 뻔(?) 했지만 결국 유턴 했다. 그 유턴이 무엇 덕분이었을까라고 묻는다면 내 여행 동반자의 끈기와 적절한 마블링의 소 덕분이었다. 역시 단백질이 최고다. 오늘 깨달은 것이 있다면, 너와 함께 보낸 시간이 전부 행복했던 건 아니지만 내가 행복하던 시간엔 항상 네가 있었다는 것. 고로 좀 고맙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