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7일의 이야기
정세랑 작가님의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은 후의 소감과 영감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작가님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 보냅니다.
수강신청이 망하리란 것을 동물적으로 직감했다. 그래서 할 것들을 진즉에 잔뜩 정리해뒀다.
혼자 740을 타고 이태원에 내려서 스틸북스(Still Books)에 갔다. 책과 테마, 책과 음식, 책과 술. 책과 함께 존재하던 그 깜찍한 주제들이 귀여웠다. 책 큐레이팅이라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서점을 돌며 애정의 층위에 대해 고민하다가 네 생일 선물로 줄 담금주를 샀다. 사면서 내가 이걸 왜 사는지, 이게 전해지 기는 할지, 마지막이 될지. 계속 고민했다. 너로부터 오늘 보자는 전화가 왔고 내가 거절했으며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서 300mL에 6000원짜리 맥주를 깠다.
맥주를 마시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 다른 버스를 타고 동대문으로 갔다. 길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으며 음주를 하는 건 꽤 짜릿한 일이었다. 동대문에는 필름을 스캔하기 위해서 갔다. 기대하던 필름 자판기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차라리 난 필름 가게 안에 있던 언니가 더 좋았다. 라이카 미니줌을 쓰는 이에게 선물해주고 싶다고 했더니, 본인도 그것을 쓴다며 행복한 얼굴로 필름 몇 개를 추천해주었다. 비싸고 비싼 만큼 잘 나오지만 선물 받지 않는다면 본인이 사서 쓰지 않을 걸 아니까, 언니에게 추천받은 두 롤을 경쾌한 마음으로 결제하고 니 담금주 옆에 뉘었다.
이번엔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갔다. 교보문고에서 우주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 한 권과 시집 한 권을 샀다. 그리고는 촐랑촐랑 걸어 홀드미 커피(HMC)에 찾아가서 수박주스를 시켜 카드를 쓰고 책을 읽었다. 에어컨 아래라 춥다며 귀여운 찻잔에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한 가득 담아주셨고 그 달달한 다정이 입에 대지도 않던 라떼를 행복한 마음으로 홀짝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장님께 언제나 트위터와 인스타를 잘 보고 있다며 심심한 인사를 건넸고 압구정으로 갔다. 꽃을 주고 싶었다. 너한테. 너의 공연이 있었다면, 그러니까 네가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분명 나는 꽃다발을 들고 갔을 테니까. 공연의 유무와 별개로 넌 고생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꽃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꽃집 사장님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비루한 꽃송이와 함께 가난한 마음으로 역을 나왔다.
나는 세미 정장을 입은 채로 한 손에는 신전 떡볶이 포장을, 한 손에는 초록병을 들고 돗자리를 매고 있는 너를 쫓아 한강으로 갔다. 잔디밭에나 아무렇게나 앉았고 수많은 강아지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훗날 알게 되지만 벌레에 지독하게 물렸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앉은 곳에서 별 얘기를 했다. 넌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놀라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고 맞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아. 내게 '놀란다'라는 것은 '의외'라는 감정을 함축한다. 그리고 의외가 성립하려면 대상에 대해 상정해 놓은 내 나름의 틀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거 없거든. 특히 너한테는. 넌 내가 예측하거나 넘겨짚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는 걸. 내 예상과 기대를 번번이 빗나가던 너라서 이제 그런 거 안 해. 네가 무슨 정보를 내게 건네든 내가 변하지 못하리라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것일지도. 나는 네가 그 날, 그 돗자리 위에서 너 스스로가 외계인이라고 소개했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거야. 놀랄 리가 없잖아.
우린 연속적인 존재들인데 도대체 어느 핀트에서 놀란단 말인가. 그 말을 건넨 너도, 그 말을 건네기 전의 너도, 건네고 난 후의 너도 그냥, '너'잖아. 네가 한 말을 듣기 전의 나도, 들은 후의 나도 그냥 '나'고. 그 발화를 기준으로 너도 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럼 놀랄 것이 없는 거잖아.
가끔 멍청하게 생각한다. 너가 정말 그 날 너가 외계인이라고 말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응은 '그럼 무얼 먹냐, 설마 사람을 먹냐?' 이고, 설령 너가 사람을 먹는다고 해도 '나도 먹냐?'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만 답해준다면 별로 토를 달 것 같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