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와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방법론 4부작 (3)
내가 호텔리어가 되리라고 꿈도 꾼 적 없었다. 호텔경영학과에 나오지도 않았고, 호텔리어를 꿈꾸며 실습이나 아르바이트를 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20대 중반의 졸업반 학생이었다. 누차 얘기한 것처럼 나는 남들처럼 끈기 있게 취업 준비를 할 자신이 없었고, 여러 가지 정신 승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세계일주를 떠나고자 했다. 하지만 수중에는 30만 원과 워킹홀리데이 비자밖에 없었고, 시작이 막막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인터넷 서핑을 하고 워홀 설명회를 다녀보다가 찾은 방법이, 숙식을 제공하는 리조트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른 글에서 각 호텔과 국가별 이야기들을 더 자세히 하겠지만, 나는 그 후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 뉴질랜드, 런던을 지나 다시 도쿄의 호텔로 이동했다. 운이 정말 좋아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홋카이도에서 3개월 후 오키나와에서 계약직 벨맨으로 6개월간 근무하였고, 뉴질랜드에선 정사원으로 프런트 데스크에서 근무하였다. 다시 9개월간 근무하다가 런던으로 넘어가며 승진하여 프런트 데스크 슈퍼바이저(주임~대리급)로 1년을 보냈다. 기회가 닿아 그곳에서 다시 승진하여 나이트 매니저(당직 지배인, 대리~과장급)로 일하다가 같은 브랜드지만 더 상위 레벨의 호텔의 일을 배워보고 싶어 도쿄로 넘어왔다. 주로 지배인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선 한국에서 5~7년의 시간이 걸리니, 내가 3년 반 만에 지배인을 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엉겁결에 시작한 호텔리어로써의 세계일주였지만 나에겐 항상 세계일주가 먼저였고 호텔리어는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런던을 떠나오며 생각을 정리해보니 호텔리어와 세계일주 두 가지가 함께 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가치 있는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호텔리어였기 때문에 세계를 떠돌 수 있었고, 세계를 떠돌았기 때문에 호텔리어가 될 수 있었다. 그 둘의 시너지 효과는 정말 크다.
호텔리어라는 직업을 정했기 때문에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대륙을 옮기고 여행을 이어 나갈 때마다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로 세계일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경력단절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동을 하면서 내 커리어도 착실히 쌓아 나갔고, 같은 브랜드의 회사 내에서 이동했기 때문에 퇴사 처리가 아니라 모두 경력으로 인정해주었다.
여행 그 자체의 방식이 바뀌었다. 나의 직업 덕분에 급하게 세계일주를 하지 않고 대륙별로 베이스캠프를 구해 일하면서 차근차근 도장 깨기를 했고, 호텔리어는 시프트 근무제 이기 때문에 남들 일하는 평일에 최저가 비행기 기간에 맞춰 여행을 다녔다. 런던에서 일할 때는 월 3회 이상 다른 나라로 떠났다. 호텔에서 식사와 유니폼도 제공했기 때문에 내 짐은 적고 돈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또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며 다른 호텔로 넘어갈 때 회사에 이야기해 1개월간의 시간을 벌었고, 그 기간 동안 이동 루트에 맞춰 여행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뉴질랜드로 넘어갈 때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거쳤고,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이동할 때는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느긋하게 여행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여행 숙소의 퀄리티가 월등히 높아졌다. 나는 원래 음식도 숙소도 잘 가리는 편은 아니어서 벌레가 나올 것만 같은 최저가 호스텔에도 잠을 잘 자는 편이다. 하지만 글로벌 브랜드 호텔의 제일 큰 복지였던 동일 브랜드 호텔 직원가 제도로 인해 팔자에도 없는 초호화 여행을 즐기기도 했다. 호텔 직원가 제도는 특히 내가 다니던 회사가 제일 좋기로 유명해서, 전 세계 어느 나라에 있는 호텔이건 동일 회사의 브랜드는 상상 그 이하의 저렴한 금액으로 숙박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호텔리어를 꿈꾼다. 고등학교 때부터 특성화 고등학교를 가거나, 대학도 관광 전문대학 혹은 호텔경영학과를 들어가 자신들의 꿈을 향해 달려간다. 호텔에서 4년 차가 되었을 때까지도 스스로의 커리어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던 내가 하면 안 될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호텔을 꿈꾼다면 어서 빨리 나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주장한다.
언어의 문제가 크다. 호텔을 꿈꾸는 많은 학생들이 언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을 한다. 영어는 물론 제2외국어까지 공부해야 하는 압박감이 쉽지는 않다. 나는 되려 그렇기 때문에 어서 빨리 외국으로 나와 일하며 돈 받으며 언어를 배우라고 하고 싶다. 학과의 특성상, 그리고 1년간의 미국 경험으로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나 또한 일본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채로 일본의 호텔에서 시작했다. 물론 너무 힘들었다. 허드렛일투성이에 나한테 뭐라고 화내는지도 모르겠고,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꾸역꾸역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일본어를 배우는 데 돈 한 푼 쓰지 않고 되려 돈을 받아가며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 꽤나 자랑스럽다. 그리고 해당 국가에서의 시간은 호텔 경력으로도 인정받는다. 한국에서 1년간 공부를 해서 토익 점수를 취득한 사람과 영국 호텔에서 일한 사람 중 어느 사람의 언어 실력이 더 신뢰가 갈까?
경력의 속도도 다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3년 반 만에 지배인이 되었고, 내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승진하는 것을 보았다. 호텔리어가 꽤나 좋은 이미지인 한국과는 다르게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는 호텔리어가 박봉에 노동강도가 높은 직업에 해당돼서, 사람 구하기도 어렵고 퇴사도 빠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확연히 빠른 속도로 인사이동이 벌어지고, 나가고 들어오고 올라간다. 런던에서 같이 일한 매니저 중에는 경력 4년 만에 5성급 객실부 부장이 된 친구도 있었다. 한국에서 계속 일했던 친구를 수차례나 설득해서 그 친구가 런던에 오자 마자 몇 개월 만에 승진하는 것도 보았다. 한국에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물론 나는 지금까지의 호텔리어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에서 일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한국의 현실을 쉽게 말할 순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 수년간 경력을 쌓으며 작은 디테일까지 신중하게 배워 나가시는 분들 또한 존경한다. 다만, 호텔리어에게 해외 경험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않으며 또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된다고 경험자로써 말할 수 있다.
최대한 간략하게 호텔리어와 세계일주의 시너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명쾌하게 글이 써지진 않는다. 나는 정말로 매 순간 운이 좋았다고 믿는다. 직업, 회사, 국가, 비자, 타이밍, 직무와 직급까지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요즘은 그 운이 다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분명히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더 좋은 방법들도 있을 것이고, 호텔리어가 아니더라도 다른 직업들도 그들 만이 가능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