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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취객 May 27. 2020

경조사에서 멀어진 떠돌이

함께 나눌 기쁨도, 슬픔도 없어 외로운 삶

    며칠 전 코로나가 이제는 잠잠해질 즈음, 대학 동기가 결혼했다. 저번 달에도 작년에도 또 더 이전에도 많은 지인의 결혼식과 장례식, 수많은 경조사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20대를 지나 서른 즈음의 우리 주변은 참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많다. 하지만 나는 떠돌이라는 핑계로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조사를 제대로 참석한 일이 없다.


    유독 한국에는 경조사가 많다. 결혼식에는 동네 불알친구부터 대학 선후배, 장례식에는 회사 상사 후임과 산악회 회원들, 돌잔치에는 일가친척 전부로는 부족하다. 시간과 자리에 상관없이, 많고 많은 지인의 경조사에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혹은 예의상, 또는 정말 가기 싫지만 얼굴 보고 살아야 할 사이라서 참석한다. 사돈의 팔촌에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의 장례식에 엄마 손잡고 따라가기도 하고, 아빠 직장 거래처의 사장님의 아들의 결혼식에 대신 축의금을 전달하고 갈비탕 한 그릇 뚝딱하고 집에 가곤 한다. 요즘에는 경조사의 참석 기준이 예전보다는 축소되어 정말 가까운 사이여야 참석하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빠지는 경조사비는 부담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여전히 기쁘고 슬픈 골칫거리가 참 많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골 사람이어서, 거기에 아버지의 고향 동네는 집성촌이어서 무슨 일이 있다 하면 동네잔치였다. 동네 사람 전부 다 당숙이니 팔촌이니, 어떻게 하던 친척의 이름으로 연결되어있었다. 할아버지 칠순잔치에 돼지 멱을 직접 따느라 고생하는 동네 아저씨들(성함도 모르지만 알고 보니 사촌 당숙이던), 나보다 나이가 스무 살은 많은 사촌 형 결혼식에 관광버스로 우르르 몰려오는 꼬불머리 할머니 아주머니들. 친척뿐만 아니라 원체 마당발인 아버지 어머니 지인들 경조사에 언제나 끌려가던 나에게는 경조사는 참 귀찮은 일들이었다.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나(10년 안에 그렇게 강산이 크게 변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제 부모님, 친척들의 경조사가 아닌, ‘내 지인들’의 경조사가 늘어날 때 즈음 나는 떠났다. 일본, 뉴질랜드, 영국을 지나 다시 일본까지 5년간 계속 방황하고 떠돌았다. 뉴질랜드와 영국에서는 멀어서 갈 수 없다는 핑계로, 일본에서는 코로나를 이유로 그 많던 경조사를 하나도 참가하지 못했다. 내 가족의 행사에도 나는 그 자리에 오지 못할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의 환갑 생신 때도, 조카의 돌잔치 때도, 항상 나는 미안한 마음에 연락하고 가족들은 괜찮다는 말로 위로했다.


    매일 술자리를 함께 하는 친구보다 기쁠 때, 슬플 때, 경조사의 옆자리에 있어주는 친구가 기억에 남는다고들 한다. 내게도 아버지의 장례식을 찾아준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구석에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다퉜던 친구들, 사이가 좋지 않던 대학 후배들에 대한 미움은 풀리고 한 번 만나고 잊혀졌던 모임의 지인과 타지에서 만나 한국에서 다시 찾아 준 선배에 대한 고마움은 자란다. 반면 나는 그 마음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가 없다.


    경조사비 절약, 정기적 인맥 정리 등 다양한 이유로 경조사가 간소화되는 요즘이다. 칠 팔순 잔치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 오래고, 돌잔치나 장례식은 가족끼리 작게, 결혼식은 혼인신고만 간단하게 하는 커플들도 많다. 경조사비 문화, 지나친 허례허식들이 우리를 너무도 지치게 했는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보단, 서로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충분히 이해된다. 다만 선택적 절제가 아닌 반강제적 불참석을 하고 있는 떠돌이들에게 경조사는, 때론 그리운 귀찮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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