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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Sep 26. 2024

내가 넘은 고비가 언덕이 되는 순간

워킹맘 에세이 번외 편

안녕하세요~인구보건복지협회 김 과장입니다.
인구이슈 지역순회 경기포럼 제안서 첨부합니다. 경기도 시책에 맞춰 선도적으로 도입한 제도로서, 경기포럼에서 우수사례로 소개하면 전국적으로 많은 홍보효과와 함께 공사의 대외적 이미지도 한층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됩니다.^^(많이 바쁘시겠지만 꼭 참여 부탁드립니다!!!)

8월 27일 회사메일로 온 연락이다.

인구보건복지협회라는 기관명을 처음 들어봐서 찾아보니...


196년 설립된 비영리 법인, 인구변화 및 모자보건과 출산지원에 관한 조사, 연구, 교육, 홍보업무를 수행하는 기관.  이곳에서 인구이슈 지역순회 포럼을 개최하는데 이번 회차가 경기도라 연락을 준 것.


앞서 브런치 글을 읽으신 분은 알겠지만, 공사에 꽤나 선진적인 가족친화경영 제도가 도입되는데

그 소식을 듣고 사례발표를 요청해 온 것이다.


비록 일의 연장이지만, 꽤 기쁜 일이었다.

진심을 다한 일이었고, 그 진심이 조금은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그간의 과정을 말하자면 굽이굽이 고비였지만,

내가 넘긴 고비가 이제 내가 비빌 언덕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언덕은 아직 낮고 작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네 쌍둥이를 키우는 프리랜서 아빠의 발표를 보며 내가 갖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제도권 안의 기득권이었나를 체감했다. 또 경기도 정책을 발제하는 인구정책담당관님은 서두에 "네 아이의 엄마로서 추석이 참 길고 힘들었다"라고 하셨는데 공직에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네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많은 일을 겪으셨을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경기도엔 '아빠하이'라는 멘토단이 있는데 3년 연속 우수활동자로 선정된 분의 발표도 재밌었다.

아이가 아빠에게 하이(hi)하고, 아빠끼리도 하이(hi) 하기 위한 아빠들의 모임이었다.

독일 베를린엔 맘카페 말고, 파파카페도 있다고 하던데 육아하는 아빠들을 위한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육아에 있어선 엄마도 정보와 네트워크 측면에선 기득권?이었던가.


사례발표 후 시간은 벌써 오후 5시.

평소라면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시간이었다.

각오하고 왔지만, 역시나 발표가 조금씩 늦어지다 보니 토론도 늦어졌다.


토론은 플로어(floor)에서 현장 질문을 받아 질의응답하는 형태였는데 내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도착했다.


"과장님과 네 쌍둥이 아빠 간 온도차이가 있을 거 같아요. 제도 안과 밖, 육아와 생활의 균형점이 다를 것 같은데 이런 관계의 지속성이랄까 정보의 통합성을 위한 방도가 없을까요? "


없었다.

제도권 밖의 양육자를 위한 새로운 제도, 제도 안팎의 양육자들 간의 연대 등을 생각해 본 적이.

그러고 보니 사회자의 말처럼 현재 정부에서 운영하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제도는 고용보험납입자 대상이다. 즉, 고용보험납입자가 아닌 사람은 제도의 대상이 아니다.

또 대기업과 공기업 근로자는 제도를 선진적으로 만들거나 도입하는 기관이지만 영세/중소사업자의 근로자는 가장 마지막에 그 제도의 혜택이 닿을까 말까 한 사람들이었다.


나의 답변은 심플했다.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솔직히 나도 몰랐고, 아마 대부분의 제도권 근로자들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 양육자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오늘과 같은 공론과 대담의 기회가 확대되길 바란다.

그렇다면 관계의 단절이 관계의 지속성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양육자라는 고객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은 하나다.

질문해서 답변받는 것은 2등 만족도, 질문하기 전에 알아서 답변이 오는 것이 1등 만족도다.

빠르게 변하는 정책들을 정보의 소비자가 직접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여력이 없는 양육자들도 많다. 영유아검진 알람처럼 시기와 지역에 따라 맞춰 정보가 도착해 주면 좋겠다"


토론까지 끝나니 오후 5시 40분.

아이가 입이 대빨 나와있을 게 보였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6시 10분. 아이와 동갑인 친구, 그 친구의 언니만 남아있었다.

아이 담임선생님이 기운 빠진 아이에게 비타민을 주고 퇴근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전과 약간 마음이 달랐다.

기존 같으면 아등바등, 조마조마하며 아이를 데리러 갔을 것이다.

(물론 그날도 그랬지만)


하지만 마음 한편에 새로운 마음이 생겼다.

'이 또한 혜택이다. 이런 삶이 매일이 아닌 게 어디냐' 하는 마음.

시립어린이집이라 연장반을 맡길 수 있고, 단축근무하며 평소에는 조금 일찍 데리러 갈 수 있는 일상.

그 일상의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새벽부터 아이는 열이 올랐고, 나는 결국 다음날 급 휴가를 쓰게 되었지만.. 급휴가를 쓸 수 있는 회사에 다니는 게 어디냐로 마음을 고쳐 잡았다)


내가 넘긴 고비가 내가 비빌 언덕이 된 것처럼

나와 같은 사람들이 넘긴 고비가 공유되고 연대될 때 우리가 비빌 언덕, 산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기회였다.


그 기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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