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산>을 출간합니다

<엄마의 유산 2> 프로젝트

by 카르멘
우리는 우리가 겪게 될 유일한 문제이며 유일한 해결책이다
(밥 프록터, <부의 확신>)


조이(Joy)에게.


엄마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확실한 기쁨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라는 걸 알고 있니?


태명처럼 너는 엄마에게 기쁨(joy)으로 태어났어.

1분 1초도 뒤바뀌면 안 됐을 너와의 만남,

1억이 1조가 되는 기적이 있대도 너의 엄마가 되는 기적과 바꿀 순 없을 거야.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편지를 써.

엄마의 기쁨인 네가, 다른 누군가에게도 기쁨이 되고 다른 누군가가 네게 기쁨이 되는 세상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너에게 전할 첫 글자 '유산'.


네가 커서 이 편지를 읽을 때쯤엔 '유산'의 사회적 의미를 알고 있겠지?

그래서 너에게 얼마나 유산을 남겨줄지 궁금하다고?


기대해.

엄청날 테니까.


엄마가 너에게 남겨줄 유산은, 백지수표야.

네가 얼마를 쓰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값이 되는 거야.


그런데 '유산(遺産)'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니?

엄마도 잘 몰라 찾아보니, 유산의 한자어엔 이런 뜻이 있더라.


유遺. 남길 유, 따를 수.

희한하지?

하나의 한자에 '남기다'와 '따르다'라는 어찌 보면 상반된 행위를 품고 있다니.

근데 바로 이 상반된 의미에서 엄마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발견했어.


엄마는 남길 뿐, 따르는 건 너의 몫이라는 거야.


이 편지는 엄마가 쓰는 거니까, 쓰는 건 엄마의 자유이자 엄마의 몫.

이 편지를 읽는 건 너니까, 편지의 내용을 따를지 말지는 너의 자유이자 너의 몫.

그렇게 엄마는 편지의 수신자인 네게 엄마의 뜻이 남겨지길 바라며, 그저 쓴단다.


무엇을 쓸 거냐고?


산産. 낳다, 자라다 산.

엄마가 낳은 것, 엄마 안에서 자라난 것을 쓸 거야.

'낳을 산' 한자가 집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모양에서 유래했다니, 유산을 쓰는 주체로서 엄마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겠지?


하지만 한 가지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이건 아주 중요해. 네가 엄마의 편지를 읽을 때 언제나 가졌으면 하는 관점에 관한 거니까.


엄마는 너를 낳고, 네가 자라나는데 도움을 줬지만

엄마가 너를 낳았다고, 너를 자라나게 했다고 그러므로 너를 안다고 이 편지를 쓰는 건 아니란다.


나는 너를 낳았지만, 진짜 널 낳는 건 너의 일이야.

나는 너를 키웠지만, 진짜 널 키우는 건 너의 몫이지.


하지만 얘야, 걱정 마.

엄마도 그랬고, 아빠도 그랬고, 우리 모두가 그 과정을 거친다.

전 생애에 걸쳐서 우리가 겪는 건 오로지 이과정뿐일지도 몰라.

우리는 누군가의 몸에서 잉태돼 세상에 나왔고, 누군가의 손을 빌어 세상에 키워졌지.

하지만 진짜 자신을 알고 만들어가는 건 결국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진짜 자신을 알아가는 건 '결론'이 아닌 '과정'이라는 거야.


그리고 '안다'는 건 단순히 겉에 드러난 외면의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내가 '모른다'는 진실까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예를 들어볼까?

너는 엄마에 대해 아니?


엄마 뱃속에서부터 먹고, 자고, 싸고 모든 행위를 엄마 손에 빌려했으니

너는 엄마를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해.

너는 역설적이게도 네가 엄마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엄마를 모르지.

너는 내 몸속에 있었지만, 그때의 너는 엄마가 느꼈던 감정과 의식에 대해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엄마가 너의 모든 존재를 뒷받침해 줬을 때, 그러니까 영유아기쯤 되려나?

엄마 없이는 세상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때, 그 때문에 엄마랑 네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었을 때, 너는 엄마를 기억하니?


아마 기억의 일부 파편들만이 존재할뿐, 온전히 그때의 엄마를 알지는 못할 거야.

네가 어렸을 때의 너를 전부 기억하지 못하듯.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지금의 엄마지.

너의 엄마가 아니었을 때의 엄마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옛날의 너의 엄마였을 적도 거의 기억하지 못해.


그러므로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너는 지금의 엄마도 일부만을 알 뿐이야.

현재의 엄마는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되고자 하는 나와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거든.

지금의 네가 그렇듯이.


혹시 이해가 됐니?

이해가 되지 않았어도 상관없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엄마는 남길 뿐,

네가 엄마의 편지를 여러 번 읽고 진심으로 받아들여 너의 내면에 남길지는 너의 몫이다.


다만, 엄마의 뜻은 네가 엄마의 유산을 네 삶의 일부로 활용하길 바라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너보다 조금 더 인생을 먼저 알아가고 있는 선배로서 부딪혔던 몇 가지 앎에 대해 말하려고 해.

그건 엄마가 몰랐기 때문에 깨달았던 앎이야.

몰라서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앎이지.


엄마는 지금부터 너에게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대해 써보려고 해.

왜냐하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야.

네가 무엇이 되려 하기 전에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너의 진짜 선택권이 될 거야.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자.
무언가를 할 수 있기 전에 우선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괴테)


그래서 너에게 알려줄 첫 번째 앎은 '귀찮음'이란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귀찮아하는 나'를 깨닫는 거지.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귀찮아하는 나'를 만나게 된단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불과 4살이었던 너도 '귀찮아'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


그런데 알고 있니?


삶의 모든 위대함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돼.

예를 들면 '사소한 귀찮음'을 극복하는 일이지.


엄마가 이 편지를 쓰기까지도 바로 이 과정을 겪었어.

미안하지만, 엄마도 귀찮았단다.

엄마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걸 조금 더 명료하게 다듬기 위한 수고,

출퇴근과 육아를 하면서 글을 쓰기 위한 수고,

처음 쓴 글을 다시금 조금 더 마음에 드는 글로 고쳐나가는 수고.

이 모든 수고가 엄마에게도 '귀찮음'이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이 귀찮음을 극복했어.

그리고 정기적으로 쓰기 위해 미래의 귀찮음까지 극복해보려 해.

그 장치로 '연재'를 시작했단다.


그렇게 엄마의 위대한 유산이 시작된 거야.

바로 이 사소한 귀찮음을 극복하는 데서 말이야.

다음 편지에서 바로 이 귀찮음이 왜 위대함의 시작인지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게.


어때? 조금은 기대가 되니?

엄마는 기대돼.


너에게 쓰는 이 편지는 엄마를 알아가는 과정이 되기도 할 거야.


다음 편지에서 우리, 만나.


*<엄마의 유산 2>는 뜻이 맞는 브런치 작가들의 공저 출간을 목표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닌 전 세계 언어로 번역돼 테드(TED)까지 진출할 대형 프로젝트죠.

저의 엄마의 유산은 매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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