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대화> 8
"엄마, 무슨 놀이하고 싶어?"
"응?
"찰흙놀이 어때?"
(우리 아들도 답정너 스타일)
"좋아. 근데 똑같은 색 찰흙이 많네. 몇 개는 뺄까?"
"안 똑같은데? 엄마 눈에 똑같아.
이건 파랑이랑 섞은 거고 이건 보라랑 섞은 거야"
"아.. 다른 거구나. 엄마가 몰랐네"
"엄마 눈 가짠가 봐"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걸까요?
순수한 사람 눈에만 다르게 보이는 걸까요?
하지만 아이가 거짓말 할리는 없으니 세 가지 찰흙통에 담긴 찰흙들은 모두 다른 색입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파랑이랑 섞은 분홍, 보라랑 섞은 분홍이 다 비슷한 분홍처럼 보이는 거죠.
엄마 눈에만 똑같은 겁니다.
과정에 참여하지 않아서 과정을 모르니까요.
눈에 보기에 같으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엄마인 저는 아이의 결과물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보다 솔직히 저는 결과중심주의 인간에 가깝지요. 목표지향적인 과정이 언제나 숏컷(shortcut)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눈에 안 보이는 건 모르겠으니,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라고 주장했죠. 그게 간편하니까요.
마흔이 지나고서야 조금씩 그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세상의 일부만을 바라보게 만드는지를 깨닫는 중입니다.
어느 인간이나 자기 속에서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없다(아미엘, 아미엘일기)
제 속에 없는 걸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어요?
제 속에 과정이 없는데 아이에게 과정을 찾을 순 없겠죠.
제 속에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믿음이 없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아이게서 찾을 순 없으니까요.
제가 사용하는 감각이 주로 시각이라면, 시각만으로 세상을 인지합니다. 그러나 시각만으로 인지하는 세상, 그건 세상의 아주 일부죠.
하나의 핑크는 사실은 보라핑크고, 하나는 하늘핑크니까요. 보라와 하늘의 세상은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아이가 하늘, 보라, 핑크를 모두 볼 수 있는 환경을 주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엄마가 하늘과 보라를 감각적으로 인지해야겠죠. 색깔의 다름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니까요.
아주 단순한 찰흙놀이를 통해 이렇게 배우다니.
아니, 찰흙놀이가 소감각만을 키우는 놀이라고 생각한 이 역시 제 편견이자 오만이었네요.
여러분이 사용하는 감각은 그것이 인지할 환경을 창조한다(제인 로버츠, 육체가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