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당신은 관심 없겠지만,

by 카르멘

“복사만 하느라 힘들지?”


“네, 영혼이 프린터에 빨려 들어가는 거 같아요”


바야흐로 15년 전쯤의 대화입니다.


현재회사에 하필(?) 사업 정산시즌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창고에서 서류철들을 뭉텅이로 가져와 하루 종일 프린터 앞에만 서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많은 서류를 일일이 검사하는지,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왜 복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등 전후맥락이나 사유 등은 생략됐죠.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내 표정을 읽은 건지 팀 과장님이 지나가는 한 마디로 건넸던 것 같습니다.


힘들지 않으냐고.


저는 무려 15년 전 MZ세대답게 “그렇다”라고 말한 것도 모자라 “영혼이 프린터에 빨려 들어간다”는 명대사를 덧붙였습니다.



그렇게 15년이 흐르고, 당시 3년 동안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동기언니를 만났습니다.


언니는 12년 전 퇴사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육아와 회사의 병행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으로 기억합니다.


그녀는 이미 중1, 초4 두 딸의 엄마로 잘 살고 있었죠.



“요새 회산 어때? 난 사실 그만둔 거 후회한 모먼트들이 있었어. 지금은 그냥 아줌마니까.

근데 또다시 돌아간대도, 비슷할 거 같아.

너무 힘들었거든.

그땐 지금처럼 육아를 이해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니까”


맞습니다.


10여 년 전 육아기 단축근무제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있었다 해도 분명한 건 여전히 3년 전 내가 최초의 사용자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함 한 장 잃어버리게 된 언니의 그때 그 선택이, 언니를 ‘그냥 아줌마’로 만들어버렸다면 그건 좀 억울합니다.


언니는 일어 능통자로 여전히 일어 실력이 녹슬지 않았고, 그녀의 사회성과 주량은 나보다 좋아 현장평가에선 아마 언니가 나를 앞설 것인데요.


최근 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내부 고객만족도조사를 실시했습니다.


특정 만족도조사 결과는 꽤 높게 나왔죠. 실제로 다른 기관들보다 꽤 선진적인 제도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여기까진 결재권자들의 입맛에 꼭 들어맞았습니다.


다만, 사달은 향후 개선계획에서 터졌습니다. 다수의 개선 의견들이 나온 부분을 정리하여 이러이러하니 저러저러하게 개선하겠다, 고 하필 제가 강력한 의지를 담아 계획을 세운 것이죠.


아니나 다를까, 내 상급자가 차상급자에게 호출을 받았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제 상급자의 표정과 전해 듣는 말로 짐작컨대 신랄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이유는 있을까”.


조직 내 지위에 따라 입장이 다르고, 입장에 따라 의견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위가 곧 권력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직원들에게 만족도조사를 왜 하느냐. 직원들의 만족도가 결국 권력으로 움직이는 조직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만족도조사가 결과에서 끝날 거면 시작할 필요도 없겠죠.


모름지기 사람의 만족은 원래 끝이 없는 것이며, 사용자 입장에서의 만족도는 사측에선 죽었다 깨나도 모르는 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입장에서 직원 개인의 역사를 알 필요는 없지만, 개개인의 역사는 분명 조직의 역사에 영향을 미칩니다. 조직은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12년 전 동기언니가 회사를 그만두는 결정을 하기 전, 조직차원의 조사결과와 대응책이 있었다면 지난 10여 년 간 동기언니와 같은 사람들의 퇴사를 조금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빈틈 사이로 분명 조직엔 구멍이 생겨났고, 땜빵질 하는 부작용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한두 명의 역사가 조직에서 사라지는 일만은 아닐 테니까요.


15년 전 라떼 시절 복사만 하던 신입사원이 과장이 되는 시간 동안, 조직도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까요?


100년이 된 기업은 100년의 지혜와 노하우가 있는 만큼 100년의 부패도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관심이 없더라도


그 관심이 조직의 밑바닥에 작은 구멍을 내어 어느 샌가 조직 내 샘물이 말라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누군가인, 당신은,


이 글을 쓰는 나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진짜 조직의 무서움이니.


내 발밑의 구멍부터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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