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모아이

내가 나로 살 것인가?

by 카르멘

솔직히 말하자.

4박 6일의 영국출장을 다녀온 지 이주가 지났다.

하지만 내 브런치의 글은 첫날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날에 머물러 있다.


머릿속에 먼지가 끼인 것 같이 느껴진다.

런던에서 비를 많이 맞아서일까?

머릿속은 아직 비가 내리는 중이라 우산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계속되는 것 같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흩뿌리는 정도라면 안 써도 되고..

비가 안 오면 우산을 접어 햇빛을 만끽하면 될 일인데.


먼지를 닦고 다듬으면 광석이 제 빛을 낼 것 같은데

시작이 시작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핑계는 주렁주렁이다.

그냥 시작을 시작하는 것 외에 방법은 없다.


오늘 다 닦아내진 못하더라도, 가장 먼저 발굴하고 싶은 광석을 골라 먼저 하나 닦아본다.



대영박물관 전경

나는 미술에 문외한이다.

이 문외한 분야에는 건축도 포함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도 겉만 훑어볼 뿐 작품을 보는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다.

아니, 굳이 지긋이 어떤 작품의 의미가 내게 닿기를 기다려본 적이 없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물론 내게도 '눈썰미'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건 기민한 직관에 가깝다.

선천적, 후천적으로 발달된 눈치의 미학 정도랄까.


이번 영국연수는 인센티브 특전인 만큼, 런던의 내로라하는 관광지들을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영국대영박물관, 타워브리지, 세인트폴, 셰익스피어 돔, 빅벤, 런던아이, 내셔널 뮤지엄, 옥스퍼드, 코츠올드.


하지만, 나는 그냥 나를 봤다.



관광지를 둘러보며 '나'를 둘러봤다.
'나'의 작품 가치가 얼마인가 생각했다.
'나'의 큐레이터가 누구인지...



영국이 과거에 약탈해 간 자원이 얼마나 대단하고, 많은지를 먼저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이 공짜인 이유도 그에 대한 대가라고 여겨졌다.

하루 종일 봐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작품들..

그런데 나는 심미안이 없으므로 가이드님의 설명을 듣고 겨우 이해하는 정도였다.

그중 내게 가장 뇌리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대영박물관의 "모아이상"

호아 하카나나이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아이상의 이목구비가 새겨진 앞면만 사진 찍곤 한다.

하지만 이스터섬에서 발견된 이 거대한 석상의 의미는 앞면이 아닌 뒷면에 있었다.

이스터섬은 조상숭배 문화가 전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자원 고갈, 부족 전쟁, 왕권 약화 등을 겪으며 쇠퇴의 나날을 걷고 있었다.

모아이상의 앞면/뒷면

이 모아이상 뒷면에는 얼핏 보면 지상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 같이 보이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다시 설명을 들여다보면 '조인(鳥人)'이라고 한다.

당시만 해도 인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신'을 숭배했고, 인간이 신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동물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가 등장했다.

바로 이 '새사람' 부조가 신에서 인간으로 신념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


우리는 종종 죽음을 떠올리며 신을 떠올린다.

모아이의 타이틀은 "Living and Dying"


그리고 인간의 숙명적 질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갖고 사는데

우리나라는 "Life or Death"로 전환이 된다.

죽음 또는 삶이라는, 결과론적 명사의 삶.


하지만 이 모아이상 뒤에 조인을 새겨 넣은 사람은 무엇을 떠올리며, 무슨 질문을 했을까.


"나로 사느냐, 나로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내가 나로서 살아갈 것인가, 남으로 살아갈 것인가.

내가 나를 찾아갈지, 남을 따라 할지, 과정론적 동사의 삶.


명사에서 동사.

남에서 나. 로의 질문이 모아이상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대영박물관 이집트관은 바로 이 모아이상의 뒷면과 반대의 삶을 비춰준다.

이집트관에는 죽음과 신이 가득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신을 받드는 조연일 뿐이다.

파라오는 신탁으로 지정한 신의 대체자로서만 존재한다.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신의 존재를 믿기 이전에 내가 나로서 존재해야 함을 조금 더 믿는다.



소원해진 브런치에 이 글을 쓰며 모아이상의 뒷면을 떠올린다.


1600~1800년경 모아이 석상 뒷면에 새인간을 새겨 넣었던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을까.


브런치 벽면에 활자를 새겨 넣고 있는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까.


반사회인, 반육아인의 정체성 속에서

반작가, 반독자의 위치에서 사실은 '나'를 새겨 넣을 자리는 남겨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이름을 단 기사와 글을 기계적으로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는 큐레이션은 사라졌다.

내가 왜 이 기사를 쓰는지,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가치를 새겨보지 않았다.

내가 얼마짜리 글을 쓰는가, 얼마짜리 기사를 쓰는가.


그 글이 내가 나로서 서게 하는 조각 중의 하나가 될 것인가?


내가 나로 살아가는 유일한 가치, 값은 바로 그 질문에 있음을 잊고 있었다.


머릿속의 먼지 한 톨이 겨울바람에 날아가고 있다.

광석의 끄트머리가 슬그머니 머리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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