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기둥 앞에서 배운 삶의 기준
돌기둥 앞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세인트 폴 앞에서,
대영박물관 앞에서,
내셔널뮤지엄 앞에서,
옥스포드의 건물들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던 건물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기둥들은 생각보다 말이 없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돌의 색깔과 조각의 모양새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세워짐' 들.
그 세월의 흔적들이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너는 어떤 기준으로 서 있니?”
이 모든 건축양식의 모태인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내가 알게 된 건축양식은 총 세 가지.
도리안, 이오니안, 코린티안.
도리안 양식의 기둥은 단순하다.
머리 장식은 거의 없고, 곡선마저 눈에 띄지 않는다. 기둥 아래에 베이스가 없다는 게 특성이다. 전통적이고 단순한 삶의 기준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많이 사용됐다.
어쩌면 그렇게 오래 버텨올 수 있는 것도 단순함 덕분일지도 모른다.
원래 단순한 게 가장 오래가는 법이니까.
단순함은 버티기의 정석이다.
이오니안 양식의 기둥은 조금 더 섬세하다.
기둥머리에 두 개의 나선형 장식이 생기고, 기둥에 베이스(base)가 존재한다.
우아한 균형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한 양식이라고 한다.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테나 니케 신전 등에 사용됐다.
이오니안은 생각하는 법이 들어간다.
기초를 쌓고, 균형을 만들어가는 사유.
마지막으로 코린티안은 화려하다.
아칸서스 잎이 가득 새겨져 있는 섬세함을 자랑하며, 감각적 완성을 드러낸다.
대영박물관과 판테온에 사용됐다.
건축가와 조각가의 개성과 감각이 드러난다.
특유의 고유성의 드러남.
도리안의 삶은 버티는 삶이고,
이오니안의 삶은 사유하는 삶이며,
코린티안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
그 건축양식의 변화처럼
먼저 서야 하고, 그다음 생각해야 하며, 마지막에야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영국에서 배운 건축물의 "에피파니"
(알아차림의 순간, 존재인식의 찰나)
도리안에서 이오니안으로, 이오니안에서 코린티안으로 이어지는 양식의 흐름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완성해 가는가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먼저 버티는 법을 배우고,
그다음 생각하는 법을 익히고,
마지막에야 드러내는 법을 선택한다.
이 과정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 바로 "아레떼"
(탁월함을 향한 과정, 나다움이 되어가는 상태)
아레떼는 성공이 아니다.
아레떼는 박수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기능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태도다.
기둥은 기둥의 역할을 다할 때 가장 아름답다.
버팀목이 되지 못하는 장식은 오래 남지 않는다.
아레떼를 산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삶의 구조를 스스로 설계하는 일이다.
에피파니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라는 인식의 순간이라면, 아레떼는 그 깨달음을 매일의 선택으로 반복하는 긴 과정이다.
대영박물관이 그리스 신전의 형식을 빌려온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전 건축은 언제나 권력과 함께 등장했지만, 동시에 보편적 기준을 상징해 왔다. 흔들리지 않는 비례, 누구에게나 같은 질서.
나는 그 기둥 아래에서 생각했다.
내 삶에는 저런 기초가 있는가.
남에게서 빌려온 말과 기준이 아니라,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구조가 있는가.
돌기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서 있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 위에 서 있니?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니?
아마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고전 건축 앞에서 멈춰 서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를 보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