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준원 Jul 16. 2019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성북동 한스갤러리 카페

한스갤러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난 알지 못한다. 포털사이트의 포스팅을 순서를 시간순으로 하니 2005년부터 나오는 것을 보니 최소한 2005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인 것은 분명하다. 내가 이 건물에 처음 갔던 시기도 이와 비슷하다. 인근 대학에 근무하면서 어느 날 우연히 들어가 보게 되었다. 북한산 자락 꽤나 넓은 부지에 지어진 두 개 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미술관과 카페였다. 그리고 그 건물 주변에는 성경의 말씀을 모티브로 한 조각 작품들이 제법 여러 점이 있다. 건축주는 믿음을 중요시하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하게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 건물이 철학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먼저 건물이 제공하는 사상의 시각화이었다. Visualisation! 중국 미술에서는 이것을 변상 變相 bianxiang이라고 한다. 불교미술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교리나 설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불화의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아이디어를 시각화(visualisation)시키는 것은 예술작품 형성의 원초적 근간이 되는 현상이며, 예술이 가진 근원적  존재 이유이다. 


변상은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단순한 사진이 예술이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한스 갤러리의 기능적 물체인 건물이 위대한 예술이 되는 것은 단순히 심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고 관람자가 그것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이 실용성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예술작품으로서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좁은문을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이 말이 한스갤러리 카페 건물이 시각화 하고 있는 아이디어, 즉 사상이다. 이것은 예수의 산상수훈의 비교적 뒤편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산상수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신앙적 차원을 넘어서서 올바른 삶의 핵심적 원리를 일깨워주는 인류를 향한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이니 특정 종교의 도그마로 치부하기에는 그 가치가 높다. 물론 여기서 좁은문은 물리적으로 그 문이 작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리로 들어갈 것을 선택하기 어려운 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좋아 보이지 않는 길, 나는 가고 싶지만 엄마가 허락하지 않을 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내가 져야 하는 길, 남이 보면 절대 가지 못하도록 말릴 만한 그런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장 쉬운 것은 대다수의 남들이 가는 길을 나도 가는 것이지만, 이것은 넓은 길이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문]의 알리사를 생각하면 좁은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고 나머지는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면이 있지만  예수가 신을 섬기는 일 이외의 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좁은문의 수사를 사용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좁은문은 우리의 삶의 전반에 시시각각 주어지는 선택의 상황에서 우리의 세속적 선택을 경계시키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사용한 수사인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진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우리는 일자성 一 者性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oneness라고 한다. 예수는 마르타에게도 "너는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쓰고 있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만 그 하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 하나가 무엇인지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가능성이 없다. 이것은 진리가 가지는 불가지성 不可知性이다. 이것은 진리가 설명 불가능함 ineffable이란 퀄리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진리는 알 수 없으며, 알 수 있다면 진리가 아니다. 만약 진리를 안다고 하여도 설명할 수 없으니, 누군가 진리를 설명한다면 그는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이 곧 진리라는 것은 이렇게 증명되는 것이다.  예수가 좁은문이란 수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까다로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불가피성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영혼은 "멸망"할 테니까 말이다.  


좁은 길을 선택하는 스킬을 좀 더 진보시킨다면, 좁은 길은 아마도 알리사처럼 신을 섬기는 길을 가느라 자신이 사랑하는 제롬의 감정에 지속적인 고통을 주고 결국 병들게 하면서라도 중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는 고차원적인 선택일 것이다. 신을 섬기는 한 가지의 길을 가는 얼핏 어려운 길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맹목적으로 규율만 지키는 처사가 되고 마는 것 아니겠는가? 예수님께 대접할 요리를 만드느라 자신은 떳떳하고 당당한데, 규율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수다를 떨고 있는 동생에게 단단히 뿔이 난 마르타처럼 말이다. 


예수는 마르타의 행위보다 마리아의 행위가 더 나은 것이라 결론지어주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대중이 선택하고야 마는 나머지 길들에 대해 "무관심"한 수준을 갖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제롬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고통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아예 제롬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 낫다. 예수님을 만나서는 다른 것은 모두 던져 버리고 그 앞을 떠나지 않았던 마리아처럼 말이다. 현명한 자에게는 좁은 길이 너른 길로 보이고 너른 길은 길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런 것이다. 길이 아닌데 그것을 밟고 싶은 생각이 날 리가 없지 않은가?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길이 아니면 갈 수 없는 법이다. 아닌 것을 다 빼고 나면 얼마나 남을까? 하나가 아닐까? 군자가 가는 길 역시  좁고도 좁다. 


좁은문 카페로 인도하는 길은 좁다. 사람을 불러들이는 매끄러운 대리석도 없다. 오히려 암석으로 불편하게 놓인 돌을 뒤뚱뒤뚱 밟고 올라가야만 카페로 인도하는 좁은 복도를 만날 수 있다. 카페는 문에 비하면 너르고 너른 큰 건물이지만 카페의 손님으로서 이 건물에 들어가는 통로는 단 하나 이것밖에는 없다. 예수의 말씀을 몸으로 느끼면서 되새기면서 자기 인생의 지침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는 카페 방문이다. 카페는 좁은 통로를 통과하여 들어올 것을 선택한 손님들에게 말할 수 없이 멋진 공간과 훌륭한 음료를 제공한다. 좁은 통로를 두말없이 접어들어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낙원이다. 그러니, 그대여, "그 카페 너무 좋은데 통로가 좁은 게 흠이야!" 이런 말은 부디 하지 마시기를.


한스갤러리 카페 [좁은문 카페]로 들어가는 좁은 길 ...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의무를 되새길 충분한 시간이 걸린다.

 

오랜만에 방문한 한스갤러리 좁은문 카페는 많이 변해 있었다. 나로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뒤편의 넓은 테라스가 있는 넓은 문을 가진 공간이 레스토랑과 카페가 되어 있었고 좁은 문을 가진 기존의 카페는 운영되지 않고 있었다. 카페 스텝의 말로 여기서 음료를 사서 그리로 가져가고 싶으면 들어갈 수는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래 그 건물을 지은 처음의 사장이 현재의 사장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유리잔을 들고 폐허가 된 낙원을 방문하였다. 이 낙원을 일구었던 바로 그 건축주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위대한 건축을 실현시킨 사람은 아마도 경영의 어려움으로 건물을 포기했어야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다수의 사람들이 좁은 문 대신 넓은 문으로 달려가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없으면 선택도 없고 선택이 없으면 너른 문으로 향하는 죄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하지만 좁은 문을 선택한 그 건축주는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위대한 생명을 얻었으리라 확신한다. 그 사람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변상의 예술을 커피 한 잔 값에 제공했다. 최소한 비루한 이 서생도 운 좋게 커피 한 잔 마시며 그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느끼고 체험하고 감복하고 찬양했다. 이것은 필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보다도 위대한 예술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이란 기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