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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Jul 18. 2019

일상이라는 기적 2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리라

오래 전의 이야기이지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활동하던 후배가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배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는 일이 많이 행복한 일인가 혹은 행복할 기회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을까 등에 대해서 나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 친구에게나 나에게나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생각이 그랬다는 것이다. 나 또한 런던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니 그리고 유럽의 대학에서 생활하다 한국 대학에 오니 불만스러운 것만 눈에 보이고 영 살 맛이 나지 않던 터라 그 친구의 생각이 영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국에 살 때는 영국생활 빨리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는 것이 그토록 꿈이었는데, 한국에 오니 더 못살겠던 참이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면 될 일을 그래도 한국에서 그냥 사는 것으로 나는 마음 먹고 있었다. 불평을 하면서 한국에 살기로 한 것이다. 실상 영국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래저래 다 맘에 안드는 것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니가 여기서 힘드니까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는 곳에 가려고 하는 것이지 뚜렷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 만약 거기 가서도 못살겠다 하면 어떻게 할래? 지구 밖으로 이민갈래?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올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거면 아예 갈 필요 없는 거잖아!”


내 말에 동의한 것인지 그 후배는 이민갈 계획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한국에서 얌전하게 대학강의를 지속하였다. 사실 난 그 때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지만 마치 질문의 답을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처럼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것은 내가 학위 논문을 쓰면서 “꿈과 환상”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였기 때문이었다.


꿈을 좇는다는 미려한 심리는 현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구가, 소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파괴적인 그 욕구가 존재의 밑둥을 흔들어 뽑아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는 것이라는 것이 당시 내가 가진 결론이었다. 그 욕구가 예술적 창조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철학적 이상으로 가는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라고 여기고 오로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일상 생활에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어느 곳을 향하는 초월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 되었다.


때마침 텔레비젼에서는 "열심히 일 한 당신 떠나라!"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문장의 광고카피가 사람들의 초월 욕구의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러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처한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를 계속해서 실천에 옮긴다면, 순차적인 일탈과 초월의 종착점은 인간의 세계를 벗어난 어떤 천국같은 것이다. 신과 같은 존재가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되거나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그러니 초월의 의지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위험도 큰 모험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노리스크 노리워드라는 자본 투자의 기본 원칙은 참으로 정의로운 것이어서 여기서도 그대로 성립한다. 왕국을 버리고 거지의 삶이라는 스크가 큰 선택을 한 석가모니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적 성취를 이루어 내지 않았는가? 다만 그 길에서 자빠지면 한 번 뿐인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그냥 떠돌이 땡중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이다. 


꿈을 좇아 멀리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가 대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그리고 그 일상이 아주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끝나는 것은 그것이 덧없는 충동이었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취한 것도 극단적 탈출을 시도하여 초월적 신비주의의 세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사소한 일상의 구조를 하나씩 따져 나가다가 위대한 깨달음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나처럼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는 떠도는 영혼이 되기가 오히려 쉽다.나야 말로 철학교수라고 입으로 떠들 줄만 알았지 실상 마음 속으로는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 살 땐 서울이 싫다가 런던에 가니 서울 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하고, 북경에 살 때는 정말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탈출하고 싶었으나, 나중에 생각하니 북경 살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는 동안에 난 가치관이 혼재된 상태로 이 세상 어디에도 흡족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심리적 떠돌이였으며, 어딜 가나 나를 특이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이방인이 되어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내 입맛에 꼭 맞게 설계된 세상을 염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면의 충동이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을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자기 자리에 붙들어 매야 하는 것은 삶이 가진 영원한 숙제이다. 사실 그런 만큼 난 한국사람이기도 하고 중국사람이기도 하고 영국사람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한국에서는 한국사람으로 살고, 영국에서는 영국사람으로 살고, 중국에서는 중국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인데, 늘상 이방인인 것을 교묘하게 특권으로 여기거나, 장소와 다른 인격과 가치관의 가면을 꺼내 들고 짜증을 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면이 있다.


수처작주 隨處作主란 말이 있다. 중국 선불교의 조사 임제 의현이 한 말이다. 가는 곳마다 그 자리에서 주인이 되라는 말인데, 난 가는 곳마다 스스로를 부러 그 곳의 손님으로 인식하였던 것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이 세상 어디에도 내 고향은 없다. 부유하는 사람이니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면 노마드이다. 노마드에게는 떠돌아야 하는 숙명이 있을 뿐 행복을 가져볼 마음조차 없다.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를 모르는 어린이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과도 같다.


들뜸을 종식시키고 스스로를 둘러싼 존재환경과, 즉 자신의 존재적 조건들과, 의식을 동기화(synchronization)시킨다는 것은 절박한 일임이 분명하다.


불교에서는 떠나지 말아야 할 네 가지의 생각의 자리를 사념처 四念處라 하는데 이것을 그 자리에 머무르며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념주 四念住라고 하기도 한다. 모두 바깥으로부터 오는 혼란스런 자극을 잘라내고 자기 자신을 이루는 존재론적 구성요소에  자신의 의식을 붙들어 맨다는 의미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불가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진리이며, 자기 존재와 의식을 동기화 시키지 못하고 들뜬 채로 살아가는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매우 큰 가르침이다.

 

명상이 유행하면서 마인드풀니스 mindfulness 라는 말을 명상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팔리어 사티 sati를 번역한 말이다. 한국에서는 ‘알아차림’ 이라고도 하고 ‘마음챙김’이라고도 하는데, 이 중에서 ‘알아차림’이란 말이 사티라는 원어의 철학적 의미를 더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티에 대한 영역어에는 마인드풀니스 말고도 어웨어니스 awareness 라는 용어도 있는데 한국어 알아차림은 그러니까 어웨어니스에 해당하는 역어인 것이다. 무엇을 알아차리라는 것일까? 사념처를 참고해서 정리해 보자면 자신의 존재함과 그 구조 자신의 의식의 작용을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속성과 변화를 알아차리고 자기 밖의 존재의 속성을 감지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인 팔정도의 조목 중에서 아마도 가장 주목하여야 할 조목인 정념 正念이 바로 사티를 가리킨다. 팔리어로는 삼마-사티인데 삼마는 ‘바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올바른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면 좀더 정확해 질 것이다. 여기서 ‘바르게’는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따라 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니 그 하나는 올바른 것이며 불교에서 그것은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가리킬 수밖에 없으니 자명한 말이다. 다만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여기서부터는 선택이다. 석가모니의 무상, 고, 무아론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거부하던지 말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알아차림 그 자체이다. 알아차림을 놓치는 순간, 그러니까 존재와 의식이 비동기화 되는 순간 자신은 인간성이 결여된 복제인간 사이보그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꿈을 좇는 '미친 '도 있고, 타인에 의해 검증된 안전한 일만 하는 '약은 '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대세와 추세를 좇아서 꿈이 유행하면 미친 로 살다가 안전이 유행하면 약은 짓만 하는 '아무 생각없는 '도 있다. 어느 쪽이 항상 옳다는 답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지언정, 배부른 돼지는 되지 않겠다"는 밀의 말을 참고한다면 '아무 생각없는 '만큼은 복제인간 사이보그처럼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자기 것을 알뜰히 잘 챙기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약은 자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자일 것이다.

 

이민을 가려던 후배도 그리고 영국에서도 차별받고 한국에서도 이방인으로 겉돌고 있던 나도 사티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 고통인 것을 알지 못하고 이것이 현재 이 곳에서 스스로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근원적 고통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그러한 것은 단 한 가지의 질문과 자명한 대답으로 증명된다.


질문: 거주하는 장소를 바꾼다고 삶이 달라질까요?  

답: 아니요.

 

사티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다시 들떠 있는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 의식으로는 이 세상 어디에 가서도 마찬가지의 불행감과 짜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사티가 되는 사람이라면 굳이 어디로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임제선사의 수처작주란 말에 댓구를 이루어 등장하는 말은 입처개진 立處皆眞이다. 지금 서 있는 장소가 참다운 자리라는 것이다, 물론 수처작주를 할 수 있다면 지금 있는 자리를 참다운 자리로 만들 수 있다는 말지만.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그냥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익숙한 바로 이 일상에서 그것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Serendipity를 일상에서 발견하라! 미친 든 약은 든 이것을 실천한다면 과거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엉뚱하고 낯선 삶이 환상하고는 거리가 먼 일상의 어느 좁은 구석의 안쪽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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