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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Jul 23. 2019

댓글에 다는 본문

브런치 신입 작가의 변

메라비언의 법칙 Law of Mehrabian 이라는 것이 있다. 메라비언이란 사회학자가 사람이 의미를 이해하는데 언어적 요소가 작용하는 비율이 불과 7%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철학과 문학에 익숙한 나에게 이 이야기는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철학과 문학은 어차피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의미를 언어를 통해 전달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그곳이 철학과 문학의 놀이터일지도 모른다.


노자는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하여 언어와 의미를 분리하는 사고에 이미 성공하였다. 석가가 말을 하지 않고 연꽃을 들어 보였더니 가섭이 빙그레 하고 웃었다는 고사는 아예 언어를 우회하여 의미를 전달하였다. 굳이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시적 언어가 그런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안다. 친구여 어쩌면 난 그대에게 미안허이/ 내 그대에게 들려줄 말이사 그지 없건만/ 내 가락이 오직 이뿐이라서/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지금은 타계한 시인 구상의 [까마귀]라는 시이다.


메라비언의 법칙은 원래 이런 인문적인 고민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다. 글 보다는 입으로 하는 말을 다루고 있고,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수준의  언어의 커뮤니케이션을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고객을 응대할 때 언어적 내용보다 말투나 자세 옷차림 등이 더 중요하다는 등의 메시지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언중유골이라 하였으니 세상에 그렇게 당연하게 일정하게 변질없이 이해되는 말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브런치에 갓 입문한 신입작가인 나는 요즘 내가 관심있는 문제들에 대해 몇 개의 실험적인 글을 올렸는데,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댓글을 받고 급히 글을 좀 고쳤다. 브런치에 쓰는 글을 누가 얼마나 읽겠느냐 하는 생각에 좀 가벼이 여겼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일부러 그렇게 연결이 잘 안되는 것을 연결되는 것처럼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것은 내가 구사하려던  설득의 기술에 해당된다. 메라비언의 법칙 중에 비언어적 요소를 끌어 올리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것은 핑계이다. 실제로도 좀 정리가 덜 된 글을 올린 사실을 발견하고 뜨끔하였다. 어쩌면 나는 to make a long story short! 긴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이라는 해묵은 대학원생의  핑계를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이건 길게 이야기 하여야 할 것인데, 매체의 특성상 짧게 하다 보니 생겨난 사고라고. 하지만 브런치는 길이를 제한하지 않으니 그건 길게 쓰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영업적 마인드가 발동한 결과라서 이제 와서 실제로 그렇게 말하였다가는 핑계의 구차함만 선명하게 만드는 짓이다. 그 댓글러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내용은 괜찮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글이 무척 고생스러웠다는 불평을 수사법을 써서 사용한 것일까? 아 따끔따끔 하여라!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얻은 큰 교훈 중의 하나는 글이란 이해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것도 아주 잘 이해되게 말이다. 만약 출간한 글이 대중의 앞에 놓였을 때 그 글을 쓸 때 읽기를 기대했던 독자층이 그 글을 읽는데 언어적으로 그리고 의미의 연결성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다면 아무리 내용이 가치가 있어도 독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저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주 어려운 내용이라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 어려운 의미를 더 이해가 용이한 형태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지도교수는 어떤 학술출판물에 대해 칭찬하는 의미로 'well read'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 잘 읽힌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 글이 잘 읽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반대라는 의미이다. 중국어로는 츠-ㄹ-부-시아 吃不下란 말이 있는데 먹었는데 잘 먹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무 매워서 못먹겠다라던가 너무 뜨거워서 못먹겠다는 말하고는 다르다. 뱃속에서 쑥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댓글러가 지적한 것은 내 글이 not-well-read 에다 츠-ㄹ-부-시아 였던 것이다.


일단 메라이언의 법칙을 고려한다면 글이 세수도 좀 하고 머리도 빗고 고운 눈 빛으로 나직나직 말을 해야 의미가 잘 전달될 것이 아닌가? 이것은 글을 잘 계획하고 구조를 잘 갖추어 써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 좋은 글을 평가할 때 convincing 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설득력이 높다는 말이다. 글이란 독자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의미를 설득해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상정하는 표현이다. 그러니 작가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잘 준비하고 철저히 조심해서 글의 외모를 매끈하게 해야 할 것이니 영업사원이 구매를 설득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음식이 잘 안먹히는 것이 어찌 손님의 잘못이랴! 요리사의 잘못이다.    


실상 노력하여도 철학을 글로 쓰고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일은 많이 어려운 것은 현실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글도 원문을 읽어보면 대개 주절주절 영 질서가 없게 써 있는 경우도 많고, 어느 정도 철학적으로 훈련된 사람이라면 10분의 1이나 100분의 1로 분량을 줄여도 아니 더 줄여도 더 더 줄여도 의미는 다 알아먹겠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실 전문 연구자들은 책을 10분의 1도 읽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문 텍스트 200자 밖에 되지 않는 [반야심경] (원제는 [반야바라밀다심경] 이다.) 하나면 대장경의 내용을 다 설명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대장경도 주절 주절 말이 너무 많은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절주절 길고 긴 대장경의 상당부분을 읽지 않은 사람이 200자를 두고 나머지의 핵심 내용을 다 담고 있다고 어찌 알겠는가? 인생을 길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구상의 [까마귀]가 인생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동의할 수 있겠는가? 주절이와 요약이 공존하는 것이, 철학을 포함하여, 문학의 세계이다. 얼마만큼 주절대다가 어느 자리에서 얼마의 분량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요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이해의 효율을 올려야 하는 글쓰기의 관건이다.


그러니, 어차피 어려운 내용이니 쉽게 쓸 수 없다는 식의 자세는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필시 지나치게 거만한 것이거나 매우 게으른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알아 듣게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의미를 변질 시켜서 쑥쑥 이해되게 하려 한다면, 이것은 글을 팔아 먹으려고 아첨하는 것이다. 주변에는 강연을 나가서 하는 말이나 책에 쓴 말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적인 자리에서 그 점을 지적하면, "에이,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면 누가 좋다고 듣겠느냐?"고 한다. 중이 헛소리를 하면 일반 대중보다 심한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철학하는 사람들 조심해야 한다. 말이 틀린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신념도 아닌 것을 떠드는 것은 메라이언의 법칙을 잘 활용한 예가 될 수는 있다. 일단 물건을 팔 확률을 높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와중에 고전의 위대한 말씀들은 고객이 왕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포퓰리즘 못지 않게 그들의 입맛에 맞게 그들의 배에 쑥쑥 들어가도록 변질 및 가공되고 있다. 시대정신이란다. 과거에 그러지 않았다는 의미도 아니다. 나는 정치학자도 경영학자도 아니지만 종교현상으로 이해되는 역사적 경험나 사회현상은 생각보다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문학이 다루는 대부분의 문제를 오롯이 종교적 문제로 이해한다. 종교는 끊임없이 대중의 입맛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켜 파워를 유지해 오지 않았는가? 노자는 그래서 "상급의 학자가 자신의 말을 들으면 감복하겠지만, 중급의 학자는 긴가민가 할 것이고, 하급의 학자는 비난하고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급으로 갈수록 숫자는 엄청나게 증가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종교론]에서 "학자들은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고래로 종교는 어차피 매우 소수만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신념이 결여된 변질가공된 말들 속에서 공부를 많이 했을수록 인간의 길을 찾는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고전의 말을 최대한 그들이 사용한 의미대로 혹은 그 문맥을 더욱 강화시켜서 의미를 더욱 넓히고 그 개연성을 더욱 높게 설명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전문적 학자가 아닌 독자들에게 변질시키지 않고 전달하고 싶다. 철학자의 직무는 소수가 가진 이해를 다수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던가?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소화가 잘 되는 문장을 연마하는데 우선 힘을 기울여야 하려나 보다.

 

글 잘 못 써놓고 뭔 말이 이렇게 많나. 그저 이 말 한마디 하려는 것이다.


"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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