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호, 첫 번째 두드림
이 글은 상식의 노크, 콕: 첫 번째 두드림의 '콕X현재' 부분에 수록된 글입니다. 정식으로 콕COC과 저작권 계약이 되어 출판된 글이므로 무단 전재/수정/재배포는 저작권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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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으로 잃어버린 시간」
30대 후반부터였던 것 같다. 새로운 시도를 잘하지 않았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며 살았다. 표면적으로는 욕심이 없는 것으로 잘 포장해 왔지만 사실 그 내면으로 파고들면, 내게 없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용기'였다. 새로운 시도로 인해 그동안 이뤄놓은 것을 잃게 되는 것, 넘어지고 나서 그 몇 배의 에너지를 써서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 넘어질 때 생긴 상처가 끝내 흉터로 남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무늬만 '안전하게' 40대를 흘려보냈다.
이제 고작 쉰 살이 넘었지만 내 삶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종종 갖는다.
32살이라는 숫자를 입력하면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이 소환된다. 마법 같은 순간이다. 나는 32살의 나로 잠시 돌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꺾이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한다.
10대, 20대, 30대 어느 한순간을 클릭해 그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 시기마다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다소 부끄러운 시간도 있고 애처로운 상황도 있다. 그렇지만 그 순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가 40대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면 화면이 오류난 것처럼 갈 곳을 잃는다. 분명히 내 일상은 40대에도 분망 했는데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하기가 쉽지 않다. 작년이 올해 같고 올해가 내년 같고, 그 안에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형태로 겹겹이 쌓여 있을 뿐이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편안함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능동적인 선택과 시도가 결여된 삶의 뒷모습을 보고 나니 허탈했다. ‘난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상처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상처는 내게 상처 이상이었다. 재생력이 약해지니 상처는 회복을 못하고 흉터로 이어졌다. 그런 경험이 쌓여 상처를 현재의 상처로만 보지 못하고 미래의 흉터로 보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 커졌다. 상처는 분명 나을 수도 있고 흉터질 수도 있는데 내 마음속 흉터에 대한 두려움이 상처를 흉터의 전 단계로만 보게 만들었다. 외부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그랬다. 상처 받기 싫어서 인간관계에서도 안전거리를 두었다. 섣부른 시도보다는 철두철미한 검증 뒤 철회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상처가 난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했다.
흉터를 남기지 않으려고 애쓴 결과 나의 40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되짚어 볼 때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도전하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실패하지도 않았다. 잃는 것도 없었지만 얻는 것도 없었다. 훗날 되짚어 본 그 하루는 수백 장의 복사본 중 한 장일뿐이었다. 진정한 삶을 미루며 그 안에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삶의 역동성이 배제된 일상은 살아가는 것이라기보다 살아지는 것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시간’이었다.
피천득은 「장수」라는 글에서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의 40대 10년은 압축해 놓고 보면 몇 년이었을까.
나를 삶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붙잡은 것은 상처와 실패가 아닌 '상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생기지도 않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 일어나지도 않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삶을 미뤄왔다. 실제로 두려움은 가만히 놔두면 점점 자라난다. 「바보 빅터」라는 책에는 ‘어떤 불행도 우리의 두려움만큼 크지는 않다’는 구절이 나온다.
두려움은 조바심을 동반한다. 상처를 흉터로 앞당겨 보았듯이 실패도 앞당겨 단정 지었다.
시카고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졸업하려면 일정 수의 과목을 통과해야 하는데 통과 못한 과목은 ‘Fail’ 대신 ‘Not yet’이란 학점을 받는다고 한다. ‘낙제’를 받은 학생은 스스로를 무가치한 ‘실패자’라고 느끼겠지만 ‘아직’이란 학점을 받은 학생은 자신이 ‘아직은 배우는 과정 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Not yet!’ 결국 내가 두려워했던 실패는 내 관점의 착오에서 온 것이다. 종착점을 서둘러 그어놓고 실패라고 단정 지었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는 없다. 아직 진행 중인 것이다. 아직 안됐다는 것은 사실 지금 '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면 된다. 지치지만 않으면 된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는 한 삶은 나아간다. 우리가 멈추지 않는 한 실패는 없다. 다만 종착점이 조금 뒤로 밀려날 뿐이다._____________
다음 호 줄거리, 「삶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살면서 아쉬운 시간 중 하나는, 인생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린 나날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온 힘을 다해 눈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문제 해결을 미루고 한 눈 팔면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고 한시름 놓아도 되나 싶으면 늘 기다렸다는 듯, 크고 작은 다음 문제가 찾아왔다. 난 그때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또 한 번 일어서곤 했다. 되돌아보니 문제 해결에 집중한 나머지 삶의 균형을 놓친 적이 많았다. 문제 풀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재미를 적절하게 분배하지 못했다. 그렇게 미뤄 놓았던 삶의 여유는 되돌려 받기 힘들었다. 어쩌면 인생의 실체는 늘 문제와 일상이 혼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인생에서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 싶다.
자칫 문제 풀기에만 치우쳐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는지, 또는 문제 풀기가 엉켰을 때, 자책하느라 한 번 더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김지연
월간문학 수필부문 신인 작품상으로 수필가로 등단. 살면서 축적했던 생각들을 글로 풀어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글들이 모여 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글이 곧 ‘나’라는 생각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