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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노자 정리 Jul 08. 2021

목적이 이끄는 삶 (10): my case

옆을 바라보면,



 정처 없이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길을 혼자 걷는 줄 알았는데 옆을 보니 아내가 있었고, 지금도 내 옆에 있다. 우리의 길은 다른 부부와는 조금 다르게 시작했다. 21세기에 이른 나이에 결혼한 커플 몇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만 25세의 나이에 결혼에 골인했다.


 우리가 살았던 신혼 집은 회사의 선배들과 팀장이 그렇게 '집들이'를 요청했으나 집이 좁아서 하지 못했던 작은 원룸에서 시작한다. 재대 후 자취했던 그 작은 자취방의 바로 윗층인 원지빌딩 403호에서 우리의 신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7.5평 정도되는 보통의 아파트의 '안방' 수준인 원룸에서 그렇기 우리는 시작했다.

자취방의 보증금 1000만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월세 50만원을 받기 원했던 원지빌딩주, 사장님과 만나서 보증금을 5000만원으로 올리고, 월세 10만원으로 깎자고 담판을 지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사장님께서는 치기어린 나의 제안을 몇번이고 거절했다.

'나는 목돈이 필요 없어요.'

'사장님, 저희는 목돈을 만들어야 합니다. 보증금 5000만원으로 올리시죠.'


 비가 오던 어느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께서 전화가 오셨어요. 보증금 5000만원으로 하시고, 월세 10만원으로 하시겠다고.'

그리고 나는 신입사원 4개월차인 10월1일에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월급통장'은 꼭 외환은행으로 하라고 홍보했던 그 행원에게 전화했다.

'신입사원 동기 30명 중에서 외환은행 통장을 월급통장으로 쓰는 사람이 몇명이죠?'

'음. 3명?'

'그 중에 연수원에서 그 자리에서 바로 월급통장 신청서를 쓴 사람은 몇명이죠?'

'정현씨 하나네.'

'저 4000만원이 필요합니다. 대출 받으러 갈게요.'

'네? 월급 몇번이나 받았다고 벌써 대출이에요?'

'세번이면 된다고 하던데요?'

'어디에 쓰려고?'

'신혼집 마련하게요'


 비가 오던 또 다른 날, 부동산으로 계약을 하러 갔다.

'사장님은 직접 오지 않으시나요?'

'아, 아까전에 오셔서 도장 찍어놓고 가셨어요. 여기'

뵙게되면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쁘셨던 사장님은 거기에 없었고, 우리는 계약을 하고 신혼집을 보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던 차에, 뒤에서 빵빵 소리가 났다. 폭스바겐의 세단이 우리 옆에 세워졌고, 원지빌딩 사장님께서 나에게 언덕 위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하시며 기사분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탄다. 졸지에 사장님 자리에 앉은 우리 부부, 그 자리의 감격은 사장님의 이 말로 채워졌다.

'김기사, 내 자리가 몇번으로 셋팅되어있지?'

'아, 1번입니다. 사장님.'

익숙하지 않은 소리를 내며, 앞자리의 등받이, 손걸이, 머리맏침이 자동으로 조절된다. 아마, 태어나서 외제차를   보았고, 기사가 딸린 사장님을 처음 봤었고,  자리에 앉게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계약하고 오신건가?'

'네. 사장님. 덕분에 감사합니다.'

'뭐, 귀찮기도 했는데, 신혼부부가 우리 빌딩에서 시작한다는게 기분이 좋더라고'

'네. 잘 살 것 같습니다.'

'잘 사시게.'



뒤를 돌아보면,



 결혼한 지 10개월, 우리는 원지빌딩 403호를 뒤로 하고 떠났다. 10개월동안 4000만원을 모았고, 그 돈을 은행에 갚았다. 최초의 목돈은 최초의 대출 상환이 되었다. 우리가 일찍 결혼한 단 하나의 이유는 유학이었다. 그러나 첫째 규가 우리 가족으로 예상치 못하게 오게 되었다. 2011년 8월, 첫째 규의 탄생은 우리의 많은 계획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렇게 유학은 우리 등 뒤로 멀어졌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85년생 아파트, 길훈 아파트가 나타났다. 우리와 나이가 같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 구식' 아파트에 원지빌딩 보증금 5000만원에 4000만원의 추가 전세 대출금을 받아서 전세 9000만원에 계약을 하였다.

 

 이삿짐 센터를 부르지 않았다. 대학교 동기들과 장인어른께서 모든 이사를 책임지고 도와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두번째 보금자리는 85년생 아파트와 함께 시작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교회까지 걸어서 10분. 회사를 가기 전에 새벽기도를 드리고 떠났다. 얼마나 좋던지. 모두가 잠든 그 새벽 공기 속에서 상쾌한 걸음으로 교회를 들어서고,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떠났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신혼이 짧게 끝났고, 둘이 아닌 셋이 되어버린 우리 부부앞에 교회가 가까워 그 삶은 그래도 의미가 있었다.


 많은 기억이 없다. 정신이 없었던 나날들 속에 난생처음 돈벌레라고 이름하는 징그러운 벌레를 보고 경악한 아내가 기억이 난다. 85년생 아파트는 따뜻했지만, 낡았고, 우리는 돈이 없었다. 85년생 아파트 바로 옆에 00년생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아파트로 옮기기 위해서 전세 대출을 2배 늘리면 되었지만, 복도식 아파트라 고소공포증이 심한 아내가 이를 꺼려했다. 교회도 옮길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런 우리에게 어느날 어머니의 전화 한통이 도착한다. 금요일 저녁이었던 것 같다.

'정현아. 저기 김포 한강 신도시라고 새로 생겼는데 거기 미분양이라고 할인을 한다는데?'

'우리가 돈이 어딨어요? 미분양이라도 할인을 뭐 30-40%하나요 아파트가?'

'그래도 한번 가봐'


 

내 앞에 놓인 길,



 첫째 아들이 신이나서 뛰어간다. 복도가 너무나도 넓다. 잘 빠졌다. 아파트 하면 '현대아파트'라고 하지만 그건 왕회장님 살아있을 때 이야기지, 쌍용이 아파트 하나는 잘 짓는다. 이렇게 구조도 잘빼고 열심히 지으니 남는게 없지. 이러다 부도나겠다.

 아내와 나, 그리고 첫째 규가 가구도 하나 없는 빈집에 앉아서 예배를 짧게 드렸다.


'하나님, 부족한 우리에게 이렇게 멋지고 좋은 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정, 예가가 되게해주세요.'


 우리 가정은 그 집에서 둘째를 가졌고, 둘째 아이가 돌이 채 되기 전에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한 것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라마단 'Ramadan'의 7월. 아부다비라는 중동의 도시로 온 가족이 떠났다.

라마단 시기에는 길거리에서 물을 마실수도, 담배를 태울 수도 없었다. 낮시간동안 금식을 해야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고난을 생각해서 정부에서 그러한 법을 제정하였으며, 당연히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중동에서는 중동법을 따라야 했다.


 아내와 두 아들들이 뜨거운 여름에 라마단의 고난까지 겹쳐서 매우 힘든 그 시점에, 우리는 우리가 살 집을 구해야 했다. 공기업과 사기업의 차이는 '꽤' 크다. 모든 것을 홀로 처리해야 했다. 1주일에 약 6.5일 (2주에 1일 휴무)라는 극악의 근무조건 속에서 우리 가족이 최소 '2년'간 살아야할 집을 수배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살 집은 방이 2-3개가 기본인 한국의 아파트가 아닌, 원룸 '1 bedroom' 아파트였다. 월세가 1년에 3300만원 정도로, 회사에서 지원하는 금액의 최대치였다.

 다시, 원룸으로 돌아간 기분은 아찔했지만, 그래도 정해진 기한이 있었기에 버텨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의 시설은 고급졌다:

멀리 UAE 최대의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그러나 사막의 화려한 외형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메마르고, 황폐했다. 내 생애 최대의 연봉을 거기에서 찍었지만, 동시에 최대의 근무시간도 달성했다. 그 메마름 그리고 '갈급함' 속에서 어떻게 2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막에서의 생활이 우리 가족의 깊숙한 어딘가를 강하게 찔러왔었고, 우리는 그 사막을 뒤로한채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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