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 (9): my case
이 이야기는 인터뷰의 형식을 따서 본인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던 2014년 말의 어느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고찰하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총 10편의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고, 오늘 그 아홉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물론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어린 시절, 공부를 좀 잘했습니다. 특히 중학교 때는 성적표를 받는 것이 어찌나 즐겁던지요? 보통 전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서 놀았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해 보지 못했으니까요. 언제나 전교 2등(못하면 3등)이라는 자리에 만족해야 했던 제가 그 전교 1등과 단 한번 나란히 자리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과학고 시험장이었죠. 부산의 곳곳에서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 몰려왔고,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강산이 두세 번 변한 지금도, 저는 그 날의 대화가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전교 1등은 전혀 기억나지 않겠죠?
'너도 왔어?'
뭐라고 대답을 하려 했는데 그 녀석은 제 말을 듣지도 않고 지나가더군요. 멀어져 가는 그놈의 뒤통수를 보면서 한 대 때려줄까 하다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교 1등이 싹수없는 것이 하루 이틀입니까? 꾹 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네가 왔는데 내가 못 올까 봐? 한 끗 차이잖아?'
그런데 세상은 냉정합니다. 분한 저와는 다르게, 적어도 과학고의 입시팀은 냉정했습니다. 싹수가 없어도 공부만 잘하면 과학고 입학은 결국 머리가 좋은 순이었습니다. 저는 과학고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녀석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배치고사를 쳤습니다. 총 12개의 반이었는데, 저는 그중에 1학년 9반에 배치되었고, 담임선생님이 저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네가 왜 9 반인 줄 알아? 너 배치고사 전교 9등이야.'
2등이나, 9등이나, 저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죠. 시큰둥한 제 표정을 보며 선생님도 당황했는지 열심히 하라고 등을 툭툭 쳤습니다. 그 가벼운 툭툭의 무게감이 아직도 제 등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그렇게 두 가지 타이틀을 가집니다.
첫째, 전교 1등은 못해봤지만 공부 쫌 하는 아이;
둘째,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은 못해봤지만 부반장은 했던 아이.
아부다비 현장에 배치되어 아부다비 온누리 교회라는 곳에서 현지 K대학 N학과의 교수님으로 계신 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이 카이스트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과 계열에서 공부를 좀 한다는 사람들의 테크트리, 아시죠? 네. 과학고를 거쳐, 포항공대를 지나 결국 카이스트에서 모두 만납니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위의 저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아니 글쎄, 집사님, 제가 그 녀석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니까요? 이름이 아무개였어요.'
'그 이름을 듣던 집사님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카이스트 까마득한 후배네요. 녀석이 원래 좀 예의 없어요.'
나의 전교 1등 그 녀석은, 역시 대단한 사람들의 테크트리를 탔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통의 사람으로 2018년에 이르러서야 석사에 도전하게 됩니다.
당신의 꿈은 박사입니까?
아내의 친구가 기억이 납니다. 그녀는 저와 같은 년도에 회사에 입사해서 정확히 1년만 다니고, 쌈짓돈을 모아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때가 바로 2011년이었죠. 저와 아내가 첫째 '규'를 세상에 처음 공개한 해, 우리가 계획했던 것을 포기한 그 해에, 그녀는 떠났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에게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결국 박사 학위를 거머쥐었다고 하는군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마치 제가 박사학위를 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목적에 따라 묵묵히 해외에서 근 10년간을 고생한 보람이 있습니다.
히드로 공항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리서처를 뽑는 자리에 2019년 10월 부로 제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박사 과정을 졸업하기 직전인 학생들만 넣어주는 자리인데 어떻게 제가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석사 논문 심사가 발표되기도 전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고생했던 건설인으로써의 삶, 그 통한의 9년을 그들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렵다는 취업을 이런 방법으로 하게 되었을 때 제 입에서는 이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거네요.'
결과적으로 제 꿈은 박사가 아닙니다. 석사를 지원하게 된 동기(Statement of Purpose)에 '박사'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히드로 공항의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놀라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UCL에서 저의 박사 학비를 대준다는 것이었죠. 물론, 제가 괜찮은 연구 계획서 research proposal을 써서, 저를 받아줄 교수가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에 저를 받아주려고 하는 교수, 현재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는 교수, 그리고 박사를 갓 졸업한 따끈따끈한 연구자 3인이 저의 박사과정 면접을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이 면접이 꽤나 귀찮았습니다. 왜냐고요? 아니, 박사 뒤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말 그대로 '과정'이 붙어있습니다. 결국 박사를 제대로 하려고 하는 학생은 이 지독하고 긴 자기만의 싸움(과정)을 헤쳐나가야 하는 거죠. 그러므로 누가 누구의 면접을 봐야 합니까? 네. 자기가 자기를 파악하고만 있으면 문제없습니다. 제가 저를 파악했으므로, 박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저는 합격입니다. 그러나, 제 박사과정의 학비를 '면제'해 주는 조건이 이 면접을 통해서 결판납니다. 만약 제 돈을 내고 박사를 하라고 한다면 저는 죽어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선비가 아닙니다.
아들 둘의 나이가 만만찮습니다. 한국 나이로 10살, 7살이고, 영국 학제로 year 4와 year 1에 속해 있습니다. 이번 9월에는 year 5와 year 2에 들어갑니다.
박사과정으로 1년에 3천만 원 내면, 제 연봉은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 합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결과적으로 면접은 잘 보았습니다. 곧 offer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면접 중에 받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두 개는 소개하고 가겠습니다.
첫째, 낯을 매우 가리는 제 앞에 낯익은 얼굴의 노교수님이 나타났습니다. 네. 얼마 전에 제 발표에 golden medal을 수여하셨던 그분입니다;
둘째, 제 나이가 적지 않음을 예를 들어 matured라 표현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Jeong, 너 경험도 장난 아니고, 나이도 있는데 matured 그렇다면, 박사 과정이 끝나면 뭘 할 거야?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저도 영국 사람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영어로 농담이 나옵니다.
"That's surpringly amazing question since I am aksing myself the same question everyday"
모두가 웃었습니다. 저는 웃으려고 했는데 괜히 진지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영어로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한글로 적을게요.
'그러니까, 나는 박사 타이틀이 목표가 아니야. 여기서 보니까 박사 과정이 참 느낌이 다른 것 같아. 한국에서는 '박사' 과정이라는 느낌이면, 여기는 박사 '과정'이라는 느낌이야. 박사를 위해 달려가는 과정과, 박사를 하는 과정은 다르다고 생각해.
나는 박사 '과정'을 통해서 산업계의 여러 회사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나의 연구를 진행하고 싶어. 왜냐하면 결국 회사에 속한 사람들은 '돈'에 움직이거든, 너도 알지? 그러나 연구자들은 연구에 움직여. 나는 세상이 돈이 아니라, 순수한 목적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이야. Purpose driven research, 그게 당분간은 내 꿈이 될 것 같아. 헤헤'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 my case 9편 여기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