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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Feb 13. 2020

가나안 교인의 변명

인생 후반전을 쫌 넘긴 40년 교회 오빠의 하프타임 생각

        

동방박사와 김일성     

  제 유년의 기억은 예배당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부모님 모두 신앙인은 아니셨습니다. 그저 후손들 위해 조상 잘 섬겨야 한다는 가풍에 따라 제례와 효를 강조하는 순박한 분들이었고 저는 애지중지 말 잘 듣는 장손이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성탄절 즈음으로 기억됩니다. 친구의 전도로 서울 도봉구 수유리 화계사 입구의 작은 예배당에 처음 가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와 마리아, 아기 예수, 그리고 김일성이 등장하는 이상야릇한 연극을 본 것 같고, 보름달 닮은 노리끼리한 '삼립 크리ㅁ빠ㅇ'을 받고 흐뭇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일성이 왜 등장했는지 한동안 의아했는데, 당시 ‘반공’은 그저 ‘공기’ 같은 것이었고 신앙생활을 포함한 전 생활영역의 '조미료'같은 단어였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 유일하게 받은 미술상이 ‘삼천만이 지켜보면 오는 간첩 설 땅 없다’라는 구호가 적힌 도깨비 닮은 간첩이 등장하는 포스터였고, 한동안 교실 뒤 게시판에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거든요. 암튼 그날 이후, 예배당에서 배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40대 초반까지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문학, 음악, 리더십, 그리고 연애의 고향, 교회      

  예배당에 첫 발을 들인 이듬해 성탄절 전야, 저는 성극에서 ‘회개하는 김정일’ 역할을 훌륭히 해 내면서 기독교인으로의 적응을 완벽히 끝냈습니다. 악역이지만 나름 주요한 배역이었지요. 이후로 연극, 문학, 중창, 기타연주 등.... 당시의 고급문화생활을 마른 스펀지가 물 흡수하듯 배워 나갔습니다. 중고 학생회 시절 문학의 밤을 준비하며 시와 수필, 연극 대본도 써 보고 당시 잉크 뭍은 등사지로 문예지를 발행하느라 밤을 꼴딱 새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거나, 회의를 조리 있게 진행하는 법을 익혔고 중고등부와 대학부 회장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리더십도 키워나갔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가르쳤고, 4부 악보 보는 법과 테너 화음으로 노래하는 요령도 터득하였습니다. 당시 예수전도단과 온누리교회를 통해 불길처럼 번지던 경배와 찬양에 매료되어 광화문 구세군회관의 ‘화요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두 손 높이 들고 천사 같은 형제자매들의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을 마주하며 드렸던 방언찬양, 감격의 포옹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학부 활동 중 지금의 아내와 교제하게 되었고 8년의 사귐 끝에 결혼에 골인하였습니다. 소위 ‘교회 오빠’의 전형이었던 셈이지요. 이렇게 교회는 저의  사회적, 문화적, 생리적 욕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채워 주는 오아시스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수수 방관자     

  재수를 통해 의과대학에 입학해보니,  캠퍼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가스가 날아들었고, 운동장의 장갑차가 일상의 풍경이었습니다. 기타의 선율과 음악을 좋아했던 저는 대학 노래패인 ‘메아리’의 공연에 몇 차례 가 보았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비장한 멜로디에만 마음이 끌렸을 뿐, 가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침마다 예수전도단 동아리방에서 QT를 하고 그날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열방을 제자 삼기 위해 노심초사하였습니다. 당시 저의 멘토였던 대학부 전도사님은 신학교 시절부터 별명이 ‘칼빈’이었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악마와의 키스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고 그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비판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던 저는 그냥 그 말 그대로 제 삶에 적용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이라는 제목의 QT책을 읽고 매일 아침 성경구절을 읽은 후 그날 내게 주시는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기억에 나는 사건 하나는, 의예과 2학년 중간고사를 앞두고 의예과 총회에서 수업거부, 시험거부가 결의되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학생들은 시험을 치르러 들어갔고, 학생회와 마찰이 빚어졌습니다. 생화학 시험이 있던 날,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간절한 맘으로 공대 호숫가 옆 벤치에서 성경을 펼쳤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로마서 3:8)         


이 말씀을 접하고 적용을 하다 보니 선은 민주화, 악은 시험거부 이렇게 보였고 저는 학생회 친구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장엔 저를 포함해 낙제가 되면 정말 곤란한 생존형 참여자가 3-4명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문제를 풀지 않고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선한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신 다는 깨달음 때문에  시험에 응했으나, 제가 작은 점수라도 받으면 시험을 거부한 친구들에게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교회와 예수전도단 수련회에서 간증 거리가 되었고 한동안 저의 신실함과 신중함의 사례로 활용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성경 66권 중 로마서를 가장 좋아했어요. 인간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기술과 대속의 교리 등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논리적인 로마서는 이과생인 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호주 연수중 영어 이름을 Paul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의 청년기를 돌아볼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이 지점입니다. 기독교는 젊은 날의 제가 욕구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친구와 애인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욕구 모두를 교회에서 채워나갔으니까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저는 시대가 요구하는 자유와 평등,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까맣게 무지한 대학생이었고 비겁한(이 단어는 좀 고민됩니다. 알고 숨었다면 비겁한 거 맞지만 전혀 무식했던지라) 수수 방관자였습니다. 당시의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궁색한 변명이지만, 철이 들어 광주 민주화 항쟁과 629 선언 등 민주화의 주요 사건들을 떠 올릴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곤 합니다. 제가 다녔던 예장합동 수유중앙교회와 화계사 사이에는 한신대학교가 있었고 그 아래 송암교회라는 기독교 장로회 소속 교회가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해부학, 생리학 책 들고 한신대 도서관을 자주 찾았었지만 그곳이 어떤 신학을 가르치는 곳인지는 도통 관심이 없었네요. 어릴 적 친구 하나는 송암교회 대학부를 다녔는데 매일 술 먹고 데모만 한다고 이상한 놈이라고 여겼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친구 손에 이끌려 송암교회를 찾았더라면 제 인생은 어떻게 변했으려나요...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해도 되는 거였어요...?     

  2004년 호주로 연수를 가서 1년여 꿈같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멜본이라는 고즈넉한 도시에서의 정착과정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도 역시 한인 교회였습니다. 당시 교제했던 분들과는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애경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2005년 귀국 후 우연히 조선일보에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라는 책의 서평을 접했습니다. 당시 명 설교가로 알려져 있고 저도 좋아하던 곽선희, 조용기 목사 같은 분의 설교를 신랄하게 비평한 책이라며 한국 교회에 매우 위험하지만 신선한 도전이라는 기사를 읽고 책을 구입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고 있던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책을 구해 읽다 보니, 구구절절 공감이 되면서도, ‘대체 이 책의 저자인 정용섭 목사 본인 설교는 어떻길래?’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대구 성서아카데미(www.dabia.net)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웹캠으로 실시간 진행하는 유료 신학강좌가 있다는 공지사항을 접하고 바로 신청을 했습니다. 이후 1년여 매주 2회 진행되는 강좌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40여 년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학문으로서의 신앙(신학개론)’에 눈 뜨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도권 교회 내에서 신론+인간론+기독록+성령론+종말론 등으로 구성된 조직신학, 교회사 등을 배워오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런 가르침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도 헷갈려서 소위 ‘이단’ 아닌가 의심도 했으나, 논리적으로 틀린 부분을 찾을 수 없었고 장로교 목사인 처남도 ‘다소 위험하지만 괜찮은 분’이라는 평가를 해 주는 바람에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습니다. 문자적인 성서 해석에 머물던 제가 인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성서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슬슬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간 당연한 일이었던 주일 성수,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전통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몰려왔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목사님의 설교였습니다. 아침 일찍 성가대 연습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만 이전처럼 맹목적인 ‘아멘’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아내에게 커밍아웃을 선포했습니다. 딱 1년만 교회의 모든 활동을 쉬고 싶다고. 그리고, 새롭게 접한 신학에의 호기심을 좇아 정용섭 목사님이 언급한 신학서적들을 읽고 더 깊이 탐구하고 싶다고. 그치만 절대 신앙을 버리는 것은 아니며, 단시 가톨릭의 수도원 신학, 불교의 면벽수도처럼 넓이와 형식보다는 깊이의 영성을 추구해 보려는 것이라고.

  그렇게 저는 가나안 교인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교인이 뭐냐고요? (교회) 안나가를 뒤집어 읽으면 가나안이 된다는....^^

  늘 그래 왔듯이 아내는 제 결심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주일 아침 아내는 교회로, 저는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나 신학강좌를 녹음한 파일을 들으며 집 뒤, 봉서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딱 1년만 ‘딴짓’하다 돌아가겠다는 저의 약속은 지금껏 지켜지지 않았고 2년 후 기다리다 지친 아내도 가나안 교인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교인의 안식처, 합창과 책담     

  2000년대 초반쯤, 병원 신우회 활동 중에 성탄절을 맞아 병원 로비에서 음악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인근 대학의 음대 교수님이 합창 지휘를 해 주셨고 그 인연으로 바로크 합창단(현 나우합창단)의 창립 단원이 되어 합창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선교 합창단인 사랑의 부부 합창단으로 갈아타게 되었어요. 어느 날 나이 차이가 좀 나 보이는 부부가 신입단원으로 오셨습니다. 호인형의 남편과 똑 소리 나는 부인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저희는 신혼부부고요, 둘 다 재혼입니다”라고 말씀하셔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남편은 전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다 막 은퇴하셨고, 부인은 백석대에서 사회복지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좀 별난 분들이다 했지만... 대면 대면하게 지내던 중, 일박 일정으로 강릉 합창제에 참가하게 되었고 남편 교수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잡담 끝에 가나안 교인으로서의 고뇌를 털어놓게 되었고 대화의 물꼬가 터졌습니다.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 함석헌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교수님의 부친 이야기부터 저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기독교인으로 살아오신 교수님의 이력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정용섭 목사님 외에 또 한 분의 멘토를 만난 하나의 사건’입니다. 두 분 김 교수님 내외와의 ‘인격적 만남’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후로 일사천리, 책앤담이라는 독서 모임에 초대되었고, 함께 오래된 미래, 라다크와 북인도 히말라야를 여행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찔한 낭떠러지와 급류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구요.


  기독교 인중에서 세례교인, 부부만 참여할 수 있다는 사랑의 부부 합창단의 고리타분함이 마음에 들리 없었던 저희는 의기투합, 모든 이에게 열린 시민 합창단인 제이콰이어를 시작하였고 김 교수님이 초대 단장, 저는 총무를 맡아 단시간에 지역 최고의 합창단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선교적 마인드로 중무장된 단원들이 많았던 사랑의 부부 합창단을 일반 시민 합창단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고 설득을 위한 이론적 배경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저희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 단원의 대부분이 성가대원인데, 평일에 또 따로 모여 성가 중심의 합창을 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 합창에 호감이 있지만 교회 다닌 적이 없는 분들의 문의에 대해 거절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그분들이 보기에 ‘당신들만의 천국’으로 보이지 않을까?

- 부부 모두가 노래를 좋아하고 4부 악보를 볼 수 있는 분들이 너무 적다. 이 때문에 단원 모집도 어렵고 발전이 안된다.

- 선교적 마인드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달란트인 합창에 비기독교인들도 참여하여 새로운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이 더 큰 차원의 선교 아닌가?          

 

 제이콰이어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탄생하였고 현재 2대 단장인 가톨릭 신자이신 지 단장님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천안, 아신 시민들이 참여하여 지역의 대표 합창단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얼마나 컸냐고요? 2015년 KBS 주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와 합동 공연(광복 70주년 기념 독립기념관 연주), 2017년 전국 환경 합창제 금상 수상.. 뭐 이 정도입니다.^^     


  이제, 책앤담을 소개할 시간이네요. 합창단에서 만난 두 분 교수님 내외와 함께 독서모임을 시작한 지 어언 십 년이 되었네요. 어릴 때부터 손에 늘 책을 쥐고 살아왔지만, 문제는 ‘편식’이었지요. 중고등학교 때 삼중당 세계문학전집 기웃거린 게 전부이고, 철든 이후로는 오직 신앙서적만 파고 또 팠더랬거든요. 신학서적이었드면 좋았을 것을, 대부분이 간증, 하나님의 뜻, 영성, 등과 관련한 소위 복음주의 신앙서적들(로이드 죤스, CS 루이스, 죤 스토트...)만 읽고 또 읽었습니다. 40대 초반 까지요. 그러던 제게 책앤담은 먹기 힘든 ‘날고기’ 같은 모임이었어요. 일단 초기 구성원중 이과생은 저 혼자였어요. 철학, 사회복지, 사회학, 영문학, 심리학.... 등을 전공한 교수님들과 함께 했거든요. 이렇게 인문학적인 학자분들의 추천 서적을 무식한 이과생이 읽자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제가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책앤담의 안 주인 빅 시스터, 김 교수님과 동 권사님의 신박한 요리, 그리고 저의 왕성한 식탐 덕분이네요. 10년이 흐르는 동안 이제는 무지했던 분야의 책들도 부담 없이 읽게 되었고, 독서량도 많이 늘었습니다. 좋은 것은 나누라고 했지요? 3년 전에는 의과대학 내에도 비슷한 작은 독서모임을 시작했고 이 역시 의대 내 유일무이한 교수 모임으로 순항 중이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인도의 엔소니 드 멜로 신부는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눕니다. 전반부 인생은  외부로부터 지식과 사상이 유입되는 수동태의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전반부에 무비판적으로 받았던 내용물들을 소화하고 흡수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유일무이한 사고와 가치관으로 확장시키는 능동태의 시기여야 한답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의 하프타임은 호주에서 보낸 15개월이었네요(축구경기 하프타임도 15분이죠!). 인생을 팔십으로 본다면 40대 초반부터 후반전에 돌입한 셈이니 그리 늦은 것은 아니군요. 물론 지금도 가고 있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지만,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후반전이 전반전보다 훨씬 소중하고 좋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후반전에 합창단 J콰이어와 책앤담과의 만남은 대체 불가능한 ‘사건’ 이입니다. 요즘 푹 빠져 읽고 있는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의 강남순 교수는 <배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인문학적 배움이란 ‘나’ 속에 갇힌 ‘자기충족적 깨달음’만이 아니다. 나-타자-세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며 깨달음이다. 이러한 의미의 배움이란 나의 인식론적 사각지대에 대한 지속적 인식을 통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확장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배움이란 정보의 축적이 아니다.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인식을 통하여, 그 ‘나’를 ‘타자’와 ‘세계’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배움이 이루어지는 통로는 매번 참으로 다양하며, 대체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될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각의 인식론적 한계는 물론 자신의 정황에 한계 지워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세네카가 그랬다지요.      

인색하게 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원인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

예기치 못한 시점에 끝나버릴 그 자원을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     


세네카 형님 말씀처럼, 인생 후반전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독서모임 책앤담은 제게 지난 10년간 가장 커다란 만족을 주었습니다.


가나안 교인의 변명     

  제도권 교회를 떠나 가나안 교인이 된 제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코이노니아(교제)이겠지요. 실제로 저 같은 가나안 교인을 비판하고 염려하는 분들은, 홀로 신앙을 연구할 순 있지만 성도의 교제인 코이노니아를 충족하려면 제도권 교회를 떠나면 안 된다는 주장들을 하시지요.       

그런데, 저의 오랜 교회 내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면, 성도의 교제라는 것의 실상이 무엇인지 의문이 갑니다. 어린 시절 다녔던 모교회에서는 친구, 선후배들과 가족처럼 지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때 나눈 교제에 영적인 교제가 있었는지 반문해 보면... 별로 떠오르는 게 없어요. 그냥 동시대를 살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같은 믿음을 고백했다는 것을 빼면 뭐가 남을까요? 천안에 정착하면서 새로 출석한 교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성가대 활동을 오래 했지만, 교인들과의 대화는 늘 아이들 교육, 건강관리, 재테크 같은 주제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런 정도의 교제는 보수 교단이 구시대 유물이라고 무시하는 성당이나, 해병전우회, 조기축구회에서도 가능한 것이더라고요. 한국 사회가 가족, 마을 공동체를 벗어나 도시화, 산업화된 칠팔십 년대에 교회가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넘어선 ‘무언가’가 과연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오래전부터 자의 반 타의 반, 이런 글을 쓰게 될 줄 알았습니다. ‘가나안 교인의 변명’이란 제목은 진즉에 정해 두었더랬습니다. 무언가 ‘변명’이 필요할 만큼, 마음 한자리가 늘 불편했단 뜻이겠지요. 짧지 않은 생의 대부분을 제도권 교회와 복음주의 보수교인으로 살아온 제가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한 것은 쉬운 결심이 아니었거든요. 저를 아는 많은 선후배, 가족 친지들이 저의 행보를 의심과 염려 가득한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적잖이 부담스럽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도 저의 가나안 교인으로서의 행보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걸음 밖에서 교회를 보니 안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흐려지고 있어요. 수십 년째 언제나 그 자리인 서울역 앞 확성기의 찬송가 소음,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 태극기 부대의 핵심이자 보수야당의 표밭, 최근 한기총 대표 목사님의 발언과 상식 이하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볼수록 이건 아니지 싶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환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눈을 열 번쯤 씻어도 찾기가 힘들어요. 니체가 그랬다지요? ‘최초이자 최후의 크리스천은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라고. 한 걸음밖에 바라본 제도권 교회, 특히 한국 교회는 예수장사를 하고 있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 교회는 정말 찾기 힘든 것 같아요.      


끝나지 않을 물음, 신 그리고 사랑     

  어느새 인생 후반전의 초입을 훌쩍 지나며 숨차게 달려가는 저에게 여전히 남은 궁극의 물음은 '신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처음에는 ‘신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지금은 '신'과 '사랑'을 분리해서 다루게 되었어요!

무비판적인 편식과 과도한 확신으로 점철된 전반부 인생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후반부는 가능한 심플하고 간결하려 합니다. 해서 러처드 커니의 신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성찰이라며 강남순 교수가 소개한 다음 문장에 가능한 오래 머무르고자 합니다.       


환대, 정의, 사랑 이 가치를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실현해 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신의 현존을 순간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사랑은요? 여전히 모르겠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 고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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