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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Jan 17. 2024

새해 첫날, 속세를 떠나俗離 오르다

청룡의 해, 속리산 문장대 신년 산행기, 24. 01. 01

새해 일출산행, 늘 욕심나는 옵션이다.

하지만, 야심한 시간에 이동해야 해서 부담이 만만치 않다.

다행히? 일기가 좋지 않다.

Y대장의 선택은 속리산.

새해 첫날부터 속세를 떠나다니, 올해 산행, 기대된다.


새해엔 입조심?


아침 7시 출발, 보은의 부지런한 식당에서 뜨끈한 생태탕으로 배를 채웠다. 젓가락에 입술 언저리를 홀라당 데었다. 생태탕 끊이는 가스불에 젓가락 끝이 달구어진 것을 모른 채 반찬을 집어 올렸다. 입 주변이 얼얼하고 쓰라리지만 액땜한 셈 치기로 했다.


 '새해엔 입조심하라는 뜻인가......?'



속세를 떠나 세심으로


유명세에 비해 볼품없는 정 2품 소나무를 차창 밖으로 알현하고 법주사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마음을 닦는 세심정까지 대략 3km는 완만한 평지길이다. 중간중간 세조길이란 이정표가 눈에 띈다. 피부병이 있던 세조가 온천 가는 길에 애용했단다. 다소 지루하지만 워밍업에 충분한 거리라서 심폐에 부담이 없다. 세심정 가는 길, 바위를 뚫고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가 애처롭기도 대견하기도 하다.


자연은 예술가! 이쁘다

    

한 십 년 후엔 바위가 쪼개질 수도

설화, 빙화, 상고대?


지난주에 내린 폭설로 응달은 곳곳이 눈과 얼음이 덮여 있다. 아이젠을 벗다 신다 하며 조심스럽게 문장대를 향했다. 오늘 코스는 문장대-신선대-천왕봉을 거쳐 법주사로 회귀하는 8시간짜리다.


커브길을 돌자 나무들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인다.

"상고댄가?" 했더니 Y 대장이 '빙화氷花'란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설화, 빙화, 상고대는 엇비슷하지만 다르다.

 


- '설화'는 말 그래도 눈꽃이다. 눈이 나뭇가지에 쌓인 것인데, 바람이 불거나 흔들면 떨어진다.

- '상고대'는 눈이 아니라 대기 중의 수증기가 청명한 겨울 밤새 얼어붙은 것으로 일종의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서리다.

- '빙화'는 설화나 상고대가 녹으면서 물이 되어 흐르다가 기온이 급강하할 때 다시 얼어붙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하늘, 구름, 바위, 나무 & 빙화


구름 속 문장대, 신선의 터 신선대


놀며 쉬며 느긋하게 걷다 보니 문장대에 이르렀다. 주봉인 천왕봉보다 유명한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운장대였는데 세조가 이곳에서 시를 읽고 강론을 하였다 하여 문장대로 바뀌었단다.


문장대에서 천왕봉 방향에 늘어선 칠형제봉의 빙화
바로 옆 거대한 정상석에 비해 초라하지만 운치 있는 옛 정상석


문장대 입구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신선대로 향했다. '체력 단련'산행 대신 '놀멍 쉬멍' 산행을 택한지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천왕봉까지의 등정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신선봉에서 조기 하산을 결정했다. 이번에도 중탈이네? 새해 첫날 '속세를 떠나 산중에 머물다'라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신박한 해석에 다들 만족했다.



신선대 인근의 기암괴석


세심정 감자전과 동동주


지루한 하산길의 끝에 다시 세심정에 닿았다.  

전국 명산 중 최고 수준이라는 감자전, 파전, 동동주를 주문했고, 흡입!했다.

고소함과 개운함이 어우러진 행복한 맛이었다.


오늘 하루 온전히 속세를 떠났다.

그리고 세심정 동동주로 마음을 씻었다.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지금 봐도 침이 꼴깍


반면교사, 금동미륵대불


하산길 어둑해진 법주사를 지나다 보니 금빛으로 번쩍이는, 거의 아파트 한채 크기의 미륵대불이 왠지 낯설다. 오랜 기억 속 부처님 모습이 아닌 듯하여, 검색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내 기억 속 부처님은 지금보다 훨씬 수수한 얼굴이셨다. 현재 모습은 2000년에 순금 80kg 금박을 입혀 새롭게 조성한 것이란다.


옛 사진을 찾아 비교해보니, '새것, 비싼 것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는 사실이 확연하다.  


비싼 부처님
시멘트 부처님

지어야 받는 복


(...)

부디 올 한 해도

건강하게 웃으며

복을 짓고 복을 받는 새해 되라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래처럼 즐겁게 이야기해요, 우리


[이해인/ 새해 첫날의 소망, 부분]



새해 첫날, 속리에서 눈코입이 호강했더니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  

올 들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인사를 백 번쯤 주고받은 것 같다.

이 때쯤 찾아 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구 속 '복을 짓고'에서 무릎을 쳤다.

받을 복이 넘쳐나려면 먼저, 복을 지어야겠군!


"Happy New Dragon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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