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일상성, 긴 여운의 아이리쉬 작가 클레어 키건
2주 전, 아들이 더블린으로 떠났다.
오랜 공부의 결실인, 첫 직장 Trinity college, Dublin은 아일랜드의 유서 깊은 대학이다.
아일랜드에 급 관심이 생겨,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챙겨 보았다. 보고 나니, 작가인 사뮤엘 바케트가 궁금해 도서관에 들렀다. [더블린 사람들]과 {고도..]의 대본, 그리고 또 다른 아이리쉬 작가인 클레어 키건의 얇은 책 몇 권을 빌렸다. 얇고 성글어 부담없는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의 하드커버 너머로 건너가 보았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p.9
첫 문장부터 흑백영화의 한 장면인 키건의 스토리텔링은 1980년대 아일랜드로 인도한다. 성근 글씨체로 겨우 100쪽을 넘긴 아쉬운 분량이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오래 서성여야 했다. [맡겨진 소녀] 이후 10여 년 만의 작품이라더니, 긴 세월 동안 키건은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고른 듯하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29
더는 할 얘기가 없자 아일린은 손을 뻗어 <선데이 인디펜던트>를 집어 펼쳤다.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이때도 펄롱은 자기가 아일린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못 된다는 생각, 긴 밤을 짧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일린도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할까? p.46
평범한 소시민이자 생활인이지만, 평온한 일상의 반복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주인공 펄롱의 허기를 아내 아일린은 납득하기 어렵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듯.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p.99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 빌. 그런데 내가 듣기로 저기 수녀원 그 양반하고 충돌이 있었다며?”
잔돈을 받아 든 펄롱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시선은 걸레받이 쪽으로 떨어져 걸레받이를 따라 방구석까지 갔다.
“충돌이라고 할 건 아닌데, 네, 아침에 거기 잠깐 있었어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p.105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구조적 부조리에 맞서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소싯적 '더 나은 함께'를 위해 작은 불꽃같이 살고 싶었다.
살아내다 보니, 맞서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침묵을 택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그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즐겨 본다. 과하지 않은 일상성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등장인물들이 묘한 쾌감을 준다. 코드가 맞는 느낌이랄까? 문득 그 이유가 '동일시'때문이란 생각에 움찔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목에 힘주고 버티고 있지만, 내면은 늘 위태로운 외줄 위.
홍상수풍으로 전개되던 소설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갑자기 내 달린다. 대단한 반전은 아니지만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는 엔딩 장면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불안한 긴장 속에서 카타르시스가 꿈틀대는 듯, 이게 바로 소설이 주는 재미지!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다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121(ending)
아일랜드 출신인 킬리언 머피가 제작, 주연을 맡은 영화가 지난해 개봉되었다니 더욱 반갑다. 우연히 접한 포스터가 눈길을 끌어서, '보아야지...' 찜해 두었다가 기회를 놓쳤다.
늘 애정하는 평론가 신형철의 깔끔한 감상평으로 마무리.
"...인간의 가능성이 서사의 필연성으로 도약하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하나를 얻게 된다. 이 작가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이런 결말 뒤에, 감히, 어떤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