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센터 이야기
외상센터에 실려온 중증외상 환자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경각에 달린 환자의 목숨에 대해 설명할 때 의료진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직계가족이 아니라면 동의서에 사인할 권리가 없을 뿐 아니라 잘못하면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생실 문 밖에서 울고 있거나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환자의 가족이지만, 분명 이를 확인하는 절차는 필요하다. 칼에 찔린 환자의 경과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족을 사칭한 가해자였던 적도 있다.
장대 같은 여름 비를 뚫고 119 대원들이 한 교통사고 피해자를 이송해왔다. 현장에서 심정지로 10분 이상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겨우 심박수가 회복된 70대 남자 환자였다. 분주하게 REBOA (대동맥 내 풍선 폐쇄 소생술)를 시행하고 응급 수술 준비를 위해 동의서를 출력했다.
"보호자 확보됐나요?"
"네, 부인분들 오셨어요."
"뭐라고요?"
"할머니 세 분이 계신데 누가 진짜 부인인지는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출혈 지점을 계산하느라 분주했던 나의 두뇌가 작동을 멈췄다. 우리나라가 일부다처제 국가였던가. 하지만 그 이상을 추리해 보기엔 일분일초가 급했다.
"가족관계 증명서에 올라있는 직계가족이 어느 분이시죠? 그분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두런댔다.
"그쪽 이름이 서류에 있슈?"
"아니유, 나는 아니고... 저짝에 한 번 물어보셔."
"나요? 나도 아닌디. 근디 선상, 그거 수술 꼭 받아야 혀?"
장 시간의 수술을 잘 마치고 나와보니 할머니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울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희대의 카사노바였던 것일까. 그것은 나만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사회적 통념 상 제대로 된 가족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다 가족인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만났던 한 노동자의 가족들이 그랬다. 작업 중 크레인에 깔려있다 구조된 환자의 복강 내에는 성한 장기가 하나도 없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지 7분 만에 ROSC(자발순환회복)가 되어 모두가 환호를 외치고 있는데 보호자들이 도착했다. 그에겐 두 딸과 아들이 있었다. 얼마나 어렵게 심장을 회복시켰는지, 아직 의식은 없지만 그래도 해볼 수 있는 치료에는 무엇이 있는지 핏대를 세우며 설명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너무 애쓰지 마세요. 거기까지만 하세요."
이후 모든 시술과 치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만을 남긴 채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환자는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등졌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인간만사를 본다. 개개인이 풍기는 독특한 빛깔과 향만큼 그들이 꾸리는 가족의 형태 또한 다양 각색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계도에 동그라미, 네모 예쁘게 그릴 수 있어야만 가족인가? 평생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그렇게 보듬으며 살아간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앞서 적은 일화에서 특정 가족의 형태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마다 사정이 있고 나는 그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어차피 그러한 사연은 사람 살리는 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의료진은 편견을 배제한 채 눈앞의 환자를 고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 다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가족과 함께이고 싶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퀴어축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가끔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 NASA (미 항공우주국)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은하 사진을 들여다보곤 한다.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티끌 같은가. 서로가 서로를 힐난할 에너지와 시간은 차라리 사랑하는 내 가족의 안위를 챙기는 데 쓰는 것이 훨씬 낫다. 나는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이 XX와 XY를 구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드리운 편견의 비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뜨는 날이 오기를 희망해본다.